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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적유령 전투, 미 2사단의 비극

임용한 | 83호 (2011년 6월 Issue 2)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1950 8월은 한국전쟁에서 가장 숨가쁜 순간이었다. 북한군은 한반도의 석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미군의 빠른 참전으로 일정에 차질이 생기기는 했지만 북한군은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며 세계 최강이라는 자부심에 넘쳐있던 미군마저도 거세게 밀어붙이며 승리의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제 단 한번의 일격만 성공하면 됐다. 북한은 최후의 공세를 위해 후방에 남겨뒀던 인민군 13개 사단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했다.

낙동강 남쪽에 있는 한국군과 미군은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한국군의 입장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8군 사령관 워커는 어쩌면 자신이 미군 역사상 가장 참혹한 패전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을 떨칠 수 없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패튼의 휘하에서 빛나는 전공을 쌓았던 그로서는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몰락의 순간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아시아의 한 귀퉁이에 있는, 거의 듣도 보도 못한 작은 나라에서 미군 2개 사단이 순식간에 유린당하는 셈이었다.
 

베테랑 참전 용사 vs. 전투력제로의 행정 참모

중과부적이니 뭐니 변명을 할 수도 있었지만 사실은 미군은 모든 면에서 완패였다. 전술 능력, 병사들의 역량, 투지, 심지어 무기의 성능까지도 북한군이 미군보다 뛰어났다. 한국전쟁을 준비한 북한군은 상당히 잘 훈련돼 있었다. 게다가 사단의 주력장병들은 중일전쟁에 참전했던 베테랑들이었다. 중국군에 가담해서 싸웠던 그들은 거의가 북한군에 편입됐다.

반면 미군은 2차 세계대전의 참전용사들이 요소요소에 남아 있기는 했지만 체계적으로 배치돼 있지 않았다. 장교단은 더욱 심각했다. 사단장 이하 지휘관의 대부분이 전투부대 출신이 아닌 행정직이나 참모 출신들이었다. 어떤 장교들은 놀랄 정도로 기초적인 전투 감각마저 없었다. 한국장교들의 회고담에미군들은 오직 도로를 따라 움직이고, 도로 옆에서 쉬고, 도로가 없는 곳이면 가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곧잘 나온다. 하지만 미군이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다. 노련한 지휘관들은 도로 가에 본부를 차리는 바보 같은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 가운데는 이런 엉터리 지휘관들이 더 많았다. 산 사면의 엄폐 가능한 곳에 본부를 차리라고 가르쳐 줘도 콧방귀를 뀌었다.

군의 훈련 상태는 더욱 형편없었다. 전쟁이 터지기 1년 전 워커는 휴가 온 듯이 일본에서 빈둥거리고 있는 병사들의 태도에 분노해서 비로소 훈련이라는 것을 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대급 이상의 전술훈련은 전혀 하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자국에서 미군의 기동훈련이 벌어지는 꼴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서 그만한 장소를 절대 제공하지 않았다. 3성 장군인 워커는 경비행기로 쉴 새 없이 시찰을 돌았는데, 비행기 안에서 현장을 분석한 뒤 현지에 도착하면 중대장에서 사단장을 막론하고 마치 사관학교 교실인 것처럼 바로 전술 강연을 했다. 기막힌 일이지만 미군 지휘부는 그만큼 무능했다.

무능한 미군 지휘부, 스스로 화 자초

미군이 우세한 것은 보급물자의 물량과 공군력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충분한 수준은 아니었다. 다행인 것은 미군이 계속 조금씩 보강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7월 중순 2보병사단 선발대가 도착했고 8 19일 마지막 38연대가 도착했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해병여단의 도착이었다. 그들은 낙동강 남쪽에서 대대급 이상의 전술기동과 공군과 육군의 협동작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군대였다.

낙동간 전선에 집결한 병력은 북한군 7, 미군과 한국군 9 2000천 명이었다. 수적으로는 연합군이 우세했지만 실제로는 결코 우세하지 않았다. 사실 북한군은 승리의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통합 지휘 능력의 부재가 모든 걸 망쳤다. 일단 낙동강 전선의 교착상태가 사전에 준비한 시나리오에는 없었다. 제일 이상한 것은 전 전선에 걸쳐 병력을 고르게 분산시키고 집중 돌파를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수한 전술능력을 과시했지만 사단급 이상으로 가면 협력 작전이 전혀 안 되고 서로 간에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이상한 분업정신을 보여주었다.

트럭과 도강장비가 부족하고 미 공군의 폭격으로 보급과 이동에 엄청난 제약을 받았던 탓도 있지만, 8월 이전에 북한군이 좀 더 집중적인 돌파를 시도했다면 낙동강 방어선은 절대 유지될 수 없었다. 당시 미군은 활용 가능한 예비대가 거의 없었다. 8월 내내 워커는 적의 공격지점을 예측하고 유일한 예비대를 그곳으로 파견하거나 윗돌 빼서 아랫돌 막는 식으로 병력을 운용했다. 그의 예측은 기적처럼 적중했는데, 단 한번이라도 틀렸거나 북한군이 워커의 예측도 소용없는 집중 돌파나 다중 돌파를 시도했다면 방어선은 무너졌을 것이다.

그 워커의 예측이 딱 한번 틀린 때가 있었다. 막 도착한 2사단의 배치 장소였다. 2사단의 훈련 상태는 엉망이었고 각 제대의 병력도 기준에 못 미쳤다. 무엇보다 사단장을 믿을 수 없었다. 사단장 카이저 장군은 55세였다. 그는 1차 대전에 참전해서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 이후는 한번도 전투병과에 근무하지 않았고 2차 세계대전도 본국에서 보냈다. 그런 그가 사단장이 된 것은 참모총장이 그의 동기였던 덕분이었다. 3명의 연대장도 모두 전투 경험이 없었다. 따라서 워커는 2사단을 가장 안전한 장소, 더 정확하게는 그가 판단하기에 가장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던 장소에 배치하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낙동강 돌출부, 대구 서쪽 현풍에서 창녕과 영산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9 1일 낙동강 방어선 전역에서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방어선 여기저기서 위험한 곳이 생겼다. 이 때 돌출부의 2사단이 무너지고 있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워커에게 날아왔다. 안전하다고 믿었기에 그곳으로 보낼 예비대가 없었다. 영산이 무너지면 밀양에서 부산으로 가는 국도가 열리고 그것으로 전쟁은 끝이었다.

이 비극적인 사태는 워커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2사단은 정찰, 경계, 배치에 모두 실패했다. 워커는 당장 비행기를 타고 2사단 본부로 쳐들어 갔는데, 본부 상황판을 보니 기가 막혔다. 부대는 너무 넓게 배치돼 있고 곳곳에 간격이 있었다. 그리고 상황판의 배치와 실제 위치가 맞지도 않았다. 사단장과 연대장 모두 예하 부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교범상 1개 중대의 담당구역은 1km였는데 이날 밤 최전방에 있던 23연대 1대대 찰리 중대의 담당구역은 무려 14km에 달했다. 북한군은 노무자로 위장해 후방과 미군부대에 쉽게 침투했기 때문에 이 간격과 중대, 대대본부의 위치를 훤하게 알고 있었다.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1만의 병력이 불과 200명에 불과한 찰리 중대본부를 덮쳐 쓸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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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email protected]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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