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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숲 불, 그리고 산처럼...

박재희 | 63호 (2010년 8월 Issue 2)
 
일본에서 한때 ‘풍림화산(風林火山)’이란 드라마가 유행했다. 16세기 중엽 활약했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집안의 한 사무라이의 이야기를 그린 이 연속극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며 인기몰이를 했다. 요즘에는 온라인 게임으로도 개발됐다.
 
다케다 신겐은 일본 전국시대에 활약했던 최강의 다이묘(大名)였다. 일본은 전국시대(1467∼1573년) 100여 년 동안 각 지역을 다스리는 다이묘들이 권력을 놓고 혈투를 벌이는 바람에 혼란에 빠졌다. 이 전쟁의 시대에 열세 살의 신겐은 처음 전투에 나섰다. 열여섯에 부하 300명을 거느리고 적의 큰 성을 점령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스물한 살 때에는 자신의 아버지를 축출하고 가이(甲斐)지방의 성주가 됐다. 이후 일본 동쪽 지방까지 장악했다. 일본은 관서와 관동지역으로 나뉘는데, 예부터 관동지역의 무사가 용맹하고 싸움에 능하기로 유명했다. 다케다(武田) 가문도 이 관동무사에 해당한다.
 
일본의 거장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은 영화 ‘가케무샤(影武者)’에서 당시 전국 시대를 주름잡던 무장 신겐을 등장시켰다. 영화 속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는 그가 앉은 장군 자리 뒤에 나열한 깃발 속에 바로 풍림화산이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휘날린다.
 
일본 무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풍림화산은 <손자병법>의 한 구절에서 유래됐다. 손자는 전쟁을 할 때는 바람(風)처럼 빠르게 공격했다가 때론 숲(林)처럼 고요해질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어떤 때는 불(火)처럼 활활 타 오르다가도 산(山)처럼 쉽사리 움직이지 않고 무거워야 한다고 설파했다.
 
병이사립(兵以詐立)군대는 속임을 통해 적보다 우위에 서야 하며
이리동(以利動)이익이 있을 때 기동해야 하며
이분합위변(以分合爲變)분산과 집중을 통해 상황 변화에 적절히 대처해야 한다.
기질여풍(其疾如風)빠르기는 바람처럼 빨라야 하고
기서여림(其徐如林)느릴 때는 숲처럼 고요해야 하고
침략여화(侵掠如火)공격할 때는 불처럼 거세야 하고
부동여산(不動如山)움직이지 않을 때는 산처럼 무거워야 하고
난지여음(難知如陰)숨을 때는 칠흑 같은 어둠과 같아야 하고
동여뢰정(動如雷霆)움직일 때는 우레나 천둥과 같아야 한다.
 
바람처럼! 숲처럼! 불처럼! 산처럼! 단어의 뜻만 떠올려도 가슴 속에 확 당기는 무언가가 느껴진다. 빠른 조직이 항상 이기는 것은 아니며, 고요한 군대가 항상 지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바람처럼 빠르게, 때로는 숲처럼 고요하게 완급을 조절할 줄 알고, 필요하다면 불처럼 거침없이, 산처럼 무겁게 처신할 줄도 알아야 한다. 풍림화산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화두다.
 
얼마 전 우리은행 이종휘 행장이 풍림화산(風林火山)을 하반기 경영전략의 화두로 제시하고 민첩하고 강건한 자세로 영업해 줄 것을 당부했다. 재일동포 기업가 손정의 씨는 자신의 경영 철학을 풍림화산(風林火山)이라고 정의했다. 자신의 철학 기반이 <손자병법>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다양한 상황에 맞는 적절한 판단과 결정은 역사 속의 ‘전신(戰神)’이나 현대 기업가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필요한 덕목이라 할 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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