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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 히틀러: 책은 毒 또는 藥?

김정수 | 30호 (2009년 4월 Issue 1)
1945년 4월 30일
오후 3시 반,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펴졌다. 방 안에 쓰러진 사람은 56세의 남자와 바로 전날 그와 결혼한 부인이었다. 남자는 12년 동안 독일의 최고 지도자로 군림하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였다. 그는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학력도 중학교 중퇴가 전부였다. 20대 후반까지 군대의 연락병으로 뛰어다니던 그가 어떻게 전 세계를 위협하는 인물로 성장했는가 하는 의문은 이후 많은 역사학자들의 연구 과제가 됐다.
 
‘책벌레’였던 히틀러
다행히도, 그리고 신기하게도 1만6000권에 이르는 히틀러의 장서 중 1300권이 미국 의회 도서관 등에 고스란히 보관돼 있다. 히틀러는 전쟁 중에도 매일 밤 1권 이상 책을 읽지 않고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는 독서광이었다.
 
‘히틀러의 개인 서재(Hitler’s Private Library)’는 역사학자 티모시 라이백이 히틀러의 북 컬렉션을 연구해 내놓은 책으로, 책이 히틀러의 성격 형성과 판단에 미친 영향을 탐구했다. 개인의 장서는 그 주인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다. 평론가 발터 베냐민은 “개인 장서는 그 주인의 성격을 나타내는 지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히틀러의 책들 역시 마찬가지다. 히틀러가 남긴 미 의회 도서관의 몇몇 책에는 그가 연필로 그은 밑줄은 물론, 책 여백에 적어놓은 메모들까지도 생생히 남아 있다. 또 히틀러의 독특한 독서 습관(항상 책 안쪽에 읽은 시기를 적어놓는)은 중요한 역사적 고비마다 어떤 책이 그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었는지 알려준다.
 
소책자가 바꿔놓은 인생행로
1918년, 연락병 생활을 마치고 형무소 경비 같은 허드렛일을 하던 히틀러는 우연히 독일 노동당(나치당) 집회에 참석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특별할 것이 거의 없는 평범한 젊은이였다. 하지만 집회에서 안톤 드렉슬러가 건넨 ‘나의 정치 입문(My Political Awakening)’이라는 소책자가 그의 인생행로를 완전히 바꿔놓게 된다.
 
히틀러는 우선 변변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자신도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됐다. 철도 수리공 출신에다가 직업이 없어 한때 나이트클럽 밴드까지 했던 드렉슬러가 정치인으로 변신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드렉슬러의 책은 히틀러에게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도 심어줬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이미 독일 전체 부(富)의 80%를 차지하고 있으며, 조직적으로 언론과 정치까지 장악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에 크게 공감했다. 그는 ‘나의 정치 입문’을 읽던 중 독일 노동당 입당 허가를 받았고, 이것이 결정적 계기가 돼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히틀러의 위세가 한창 오르던 1930년대 중반, 나치와 가톨릭의 충돌이 책에서 시작돼 책으로 끝났다. 히틀러의 최측근이며 정치 고문이던 알프레트 로젠베르크가 자신의 책 ‘20세기의 편견(The Myth of the 20th Century)’에서 일부다처제와 낙태를 지지하면서 갈등이 시작됐다. 가톨릭교회는 즉시 이 책을 금서 목록에 올렸고, 히틀러는 수백만 명이 넘는 가톨릭 신자들의 지지를 송두리째 잃을 위기에 처했다.
 
그러던 중 유명한 나치 협력자인 알로이스 후달 대주교가 1937년 펴낸 ‘국가 사회주의의 기초(Foundation of National Socialism)’가 갈등 해결의 물꼬를 텄다. 후달은 책에서 나치와 가톨릭의 공통점과 상생 가능성을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나치와 가톨릭은 공통적으로 반유대적이며, 양자가 합심해야만 가톨릭을 탄압하는 러시아 공산주의를 막을 수 있다는 논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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