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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M 데이터 분석의 맹점

김정수 | 18호 (2008년 10월 Issue 1)
한때 마케팅 업계에 ‘고객관계관리(CRM)마케팅’ 열풍이 분 적이 있다. IT 기술의 급속한 발달 덕분에 기업이 방대한 고객 정보를 보유하게 된 것은 물론 이 데이터를 가지고 예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다각적인 분석을 불과 몇 시간 안에 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은행·통신업체·정유사 등 많은 기업이 연소득과 연령, 서비스 사용 빈도, 요금 연체 등 다양한 기준으로 고객을 분석했으며 그 기준은 점점 더 세분화(micro-segmentation)됐다. 심지어는 동네 소주방에서도 고객 멤버십 카드를 발급했다.
 
그러나 이런 열풍이 가라앉으면서 반론이 만만치 않게 제기되기 시작했다. 폴 눈스와 브라이언 존슨이 공저한 ‘Mass Affluence’는 CRM의 세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첫 번째, CRM의 효용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막대한 투자비용을 합리화할 만큼 크지는 않다. 두 번째, 타깃 고객의 소비 행태를 분석해 그 니즈를 아무리 잘 파악하더라도 기업이 지속적인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새로운 고객군을 찾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공감을 느낀 것은 저자들이 세 번째로 지적한 문제점이었다. 그것은 바로 CRM 열풍이 가져온 ‘근시안적 마케팅(customer-focus myopia)’의 부작용이다. 다음의 사례가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CRM 자료만 있으면 상품개발 OK?
필자가 모 신용카드 회사를 위해 상품개발 컨설팅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였다. 이 회사는 당시 국내 최강의 CRM팀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신속한 분석 능력을 바탕으로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수백만 고객의 카드사용 내용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파악할 수 있었다. 우리 컨설팅팀은 고객사의 CRM 자료만 있으면 손쉽게 고객 니즈에 맞춘 신상품을 개발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CRM 자료에 기초한 상품 개발은 큰 한계에 부닥쳤다. 이유는 신용카드라는 상품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신용 카드를 휴대전화와 비교해 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 1대의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 사용 내용이 곧 소유자의 휴대전화 관련 니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손쉽게 문자를 많이 쓰는 고객군과 국제전화를 많이 쓰는 고객군, 동영상을 많이 보는 고객군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때 동영상을 많이 보는 고객군을 찾아내 ‘정액제 동영상 요금’이란 요금상품을 제시하는 것이 전형적인 CRM 마케팅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2개 이상의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다. 그 결과 A카드는 대중교통을 탈 때, B카드는 아파트 관리비를 낼 때, C카드는 극장 할인을 받을 때만 사용하는 패턴이 나타나곤 한다. 때로 A카드는 평소에 사용하고, B카드는 A카드가 연체됐을 때만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 보니 CRM팀이 자사 카드의 사용 패턴만 보고 고객의 니즈를 섣불리 분석했다가는 현실과 동떨어진 엉뚱한 결과가 나오기 십상이다. 극단적인 경우 A카드를 지하철 탈 때만 이용하는 억대 연봉자에게 ‘지하철 이용에 더 편리한 카드’만을 제안하게 된다. 게다가 우리 회사의 CRM 자료를 통해 이 고객이 다른 회사 카드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알 수 없다. 결과적으로 회사는 해당 고객의 진정한 잠재가치를 파악하지 못해 백화점이나 식당에서의 매출 기회까지 잃게 된다.
 
이것이 바로 현재 손에 쥔 고객 특성에만 얽매인 근시안적 상품 개발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콘셉트가 뚜렷한 상품이 고객 유인
그렇다면 이런 문제점을 해결할 대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콘셉트가 뚜렷한 상품을 개발해 타깃 고객이 스스로 그 상품을 선택하도록 유도하는 이른바 ‘신개념 풀(pull) 마케팅’이다. ‘Mass Affluence’는 이와 관련해 일곱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특정한 상황에서 사용하는 상품(occasional-use product)’ 개발이다. 1987년 나이키는 서퍼들이 물속에서는 잘 미끄러지지 않으면서 물가의 자갈 위를 걸을 때는 발을 보호하고 적당한 쿠션을 주는 신발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회사는 곧 일반적인 고객들이 1년에 한두 번 신을까 싶은 ‘물놀이 신발’인 아쿠아삭(Aqua Sock)을 시판했다.
 
물론 이 신발의 판매 대상인 고객의 명단(CRM 자료)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아쿠아삭은 그 어떤 신발보다 사용 빈도가 낮았지만, 매우 독특하고 명확한 콘셉트 때문에 이런 신발을 갈망하던 서퍼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CRM 마케팅의 효용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상품 개발에는 현재 고객들의 데이터를 분류하고, 정보를 조금 더 얻어내는 것 이상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시장의 전체적인 트렌드(big-picture trends)와 새로운 시장 기회(new market-level opportunity)를 명확히 파악하고, 이에 따라 타깃 고객이 스스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명확한 상품 콘셉트를 발굴하는 것이야 말로 상품 개발자들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거시적 역량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산업자원부 사무관으로 국제통상 및 기획예산을 담당하다가 2001년 베인&컴퍼니 컨설턴트로 입사했다. 금융·소비재·물류 등 다양한 부문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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