畵中有訓
편집자주
미술사와 문학 두 분야의 전문가인 고연희 박사가 옛 그림이 주는 지혜를 설명하는 코너 ‘畵中有訓(그림 속 교훈)’을 연재합니다. 옛 그림의 내면을 문학적으로 풍부하게 해설해주는 글을 통해 현인들의 지혜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항저우 영은사, 상상의 풍경
그림의 제목은 ‘영은제시(靈隱題詩, 영은사에서 시를 짓다)’이다. 영은사(靈隱寺)는 중국의 절강성 항저우(杭州)의 서북쪽에 자리한 절이다. 그림에 그려진 인물은 깊은 산속 영은사에서 시를 짓는 낙빈왕(駱賓王, 634∼684)의 모습이다. 낙(駱)이 성이요, 빈왕(賓王)은 이름이며, 당나라 초기의 뛰어난 시인이다.
아름다운 항저우에서도 시간을 내어 찾는 명소가 영은사이다. 5세기에 이곳에 온 인도불승이 신령스런 혼이 잠겨 있는 기운이 있다고 감탄하며 이곳에 절을 세우고 ‘영은(영혼이 숨다)’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지금도 영은사는 웅장하고 수려하다. 다만 이 그림 속 높이 선 사찰과 푸른 산천은 조선 후기 화원화가 양기성이 낙빈왕의 시 ‘영은사’에 의거해 그려낸 상상경이다. ‘영은사’ 전문이 이 그림 왼쪽 페이지에 따로 실려 있다. 이 시의 전반부는 이러하다.
취령이 울창하게 우뚝 솟아 있고, 鷲嶺鬱苕嶢,
용궁이 잠긴 듯 적막하구나. 龍宮鎖寂寥.
누대에서 바라보니 검푸른 바다 위로 해 비치고, 樓觀滄海日,
문은 절강의 조수를 대하고 있도다. 門對浙江潮.
솟은 산, 일렁이는 파도, 붉은 해 등 ‘영은사’에 묘사된 내용이 화면에 옮겨져 있다. 그림 속 경치는 항저우의 호수라기보다는 바다물결 일렁이는 우리나라 동해안의 일출 광경 같다. 18세기 전반기 한양에서는 동해안의 일출 장면이 유행처럼 그려지고 있었으니 그럴 만하다. 말하자면, 이 그림 속 풍경은 조선 후기 화가가 상상한 항저우 영은사다.
낙빈왕, 정의를 세운 뜻
조선왕실에서 모처럼 공들여 제작한 그림첩 <예원합진>에 낙빈왕의 ‘영은사’가 실린 이유는 무엇일까? 24개의 이야기로 엮어진 이 그림첩에 당나라 시인으로는 두자미, 맹호연, 조당, 그리고 낙빈왕이 선정됐다. 이 가운데 낙빈왕은 기개 높은 지사(志士)로 유명하다. 낙빈왕은 세상의 뜻을 모아 당나라 황실을 올바르게 세우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한 인물이다. 장안과 낙양에서 멀리 떨어진 강남땅 영은사에서 그는 늘그막을 숨어 지냈다고 한다.
낙빈왕이 20대 중반일 때 당나라 황실에서는 무(武)씨 여인 하나가 황실을 휘젓기 시작했다. 무씨 여인은 애당초 당나라 2대 황제 태종의 후궁으로 들어왔는데 나가서 비구니가 됐다가, 다시 황실로 들어와 3대 황제 고종의 후궁이 됐다. 무씨 여인은 고종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왕후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올랐다. 왕후를 모함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죽였고 권력을 확대하려고 자신의 아들도 죽였다. 그녀의 딸과 아들이라 하지만 곧 황제의 자손들이다. 여황제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등장을 휘감고 일어난 엄청난 소용돌이의 물결이었다.
낙빈왕은 측천무후가 황제에 오르려고 할 때 반대 의지를 모으고자 글을 써서 세상에 제출했다. 측천무후를 토벌하고자 하는 서경업 장군을 도와 토벌에 적극 참여하자는 취지를 담은 ‘서경업 장군을 도와 측천무후를 처벌하자는 격문’이다. 이 글은 미천한 무씨 여인이 두 황제의 후궁이 된 패륜적 행동을 지적하며 그녀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속인 죄상을 낱낱이 고발했다. “게다가 그 마음은 도마뱀과 살무사처럼 악독하고 그 성품은 여우와 시랑처럼 간사하고 잔인하다”고 하여 무씨 여인의 인간성을 심한 욕설로 공격했다. 다시 중국의 관료들을 향해 “자신의 성에 연연해 이럴까 저럴까 망설인다면 오히려 역사의 저버림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황실의 정통을 바로잡는 일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역사의 판단
역사적 사실은 잔인할 때가 있다. 측천무후는 황제에 올랐고 서경업은 반란군의 죄명을 뒤집어썼다. 황제의 죄상을 낱낱이 고발하고 극단의 욕설로 공격한 낙빈왕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측천무후가 낙빈왕의 격문을 읽었기에 낙빈왕은 살해됐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수려한 영은사에서 늘그막의 일화를 남긴 시인 낙빈왕의 이야기는 세상에 떠도는 전설일까. 잔인한 사실 때문에 훗날의 이야기들은 종종 낭만적으로 변질된다. 역사의 기억이 간혹 환영을 짓는 경우들이다. 두 황제의 후궁으로 들어가 숱한 사람을 죽인 파렴치한 무씨 여인이지만 중국 최초의 여황제로 성공했기에 현대 중국에서 제작된 드라마에서는 그녀의 영웅스러움이 부각되기도 한다.
조선시대 문인들이 애호해 많이 그려진 중국 여인을 꼽으라면 왕소군(王昭君)이 떠오른다. 그녀는 한나라 황실의 후궁이었다가 오랑캐에게 선물로 받쳐졌다. 정치적으로는 국가 간의 화친을 도왔으니 나라에 충성한 의로운 여인이다. 그러나 그녀는 북녘에 홀로 가서 오랑캐 우두머리의 아내로 살았고 그들의 풍속에 따라 아들의 아내가 돼야 했다. 세상에서는 그녀가 한나라 후궁이던 시절 후궁의 얼굴을 그려 황제에게 전달하던 화가가 자신에게 뇌물을 주지 않는 왕소군의 도도함을 밉게 보아 그녀의 초상을 밉게 그린 탓에 황제에게 선택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번져나갔다. 왕소군의 곧은 성품으로 인한 그녀의 슬픈 인생살이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그녀는 원래 절세미인이었다고 하여 중국 대표적 미인의 반열에 올랐다. 그녀는 자신의 슬픈 이야기를 비파로 연주하며 노래했다고 한다. 옛 그림 속 한 여인이 비파를 들고 털옷을 입고 있다면 틀림없이 왕소군이다.
문제는 역사가 흐른 뒤 누가 살고 누가 죽는가이다. 역사의 진실이 여기서 드러난다. 역사적 사실을 넘어서 의미가 제시되는 흥미로운 측면이다. 왕소군은 북쪽 땅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었고 영영 중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고 그녀의 모습은 헤아릴 수 없는 수량의 화폭으로 살아났다. 오늘날 베이징국제공항에서 중국 고전미녀인형 시리즈가 판매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두툼한 털 드레스를 입고 비파를 안고 있는 아름다운 자태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왕소군을 칭송하는 역사의 판단이다.
조선왕실의 화첩에서 살아난 인물은 격문을 쓴 낙빈왕이다. 조선에서 가장 멋진 경치로 자랑삼던 동해안 일출의 이미지로 낙빈왕 시 속에 깃든 포부가 표현됐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영은사’에 담긴 성찰
그림 곁에 적혀 있는 ‘영은사’ 시에서 다시 읽을 구절이 있다. 조선시대 왕실자제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이 그림책 <예원합진>을 꾸릴 때 좋은 글을 추리고 추린 당시 학자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서리가 엷게 내릴 때 꽃이 다시 피어나더니, 霜薄花更發
얼음이 가볍게 얼 때 잎들이 번갈아 시든다. 氷輕葉互凋
세상의 이치는 상황이 안 좋아질 때 드러난다. 공자가 날이 추워진 후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 것도 그러하다. 상황이 변해도 마음을 지키는 지조의 상징이다. 위의 시구는 좀 더 오묘하다. 서리가 엷게 내릴 때 피는 꽃은 오상고절(傲霜孤節, 서리를 이기고 홀로 피는 절개)이라 불리는 국화다. 그러나 얼음이 얼면 국화마저 시들고 많은 잎들이 번갈아 시든다. 낙빈왕의 뜻이 국화로는 피었을지언정 얼음을 이겨내지는 못했던 것일까. 영은사에서 겨울을 맞는 낙빈왕은 자연의 풍경을 담담하게 읊고 있을 뿐이다.
세상과 일을 바라보는 시각은 길수록 좋다. 한치 앞의 이득과 성공에 연연하지 말고 긴 시간 속에서 진행되는 역사의 사실과 진실을 깊숙하게 성찰하라고 가르치는 학자들의 마음을 이 그림에서 읽을 수 있다.
고연희 이화여대 강사 [email protected]
필자는 한국한문학과 한국미술사로 각각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시카고대 동아시아미술연구소의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이화여대, 홍익대, 연세대, 덕성여대 등에서 강의했다. 조선시대 회화문화에 대한 문화사상적 접근으로 옛 시각문화의 풍부한 내면을 해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조선후기 산수기행예술 연구> <조선시대 산수화, 필묵의 정신사> <꽃과 새, 선비의 마음> <그림, 문학에 취하다> <선비의 생각, 산수로 만나다> 등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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