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DBR은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소통과 공감이란 개념이 시대의 화두가 된 지 오래다. 그래서 그런지 사회 도처에서 기부문화에 대한 캠페인이 우후죽순 늘어나고 있다. 이제 사회 지도층에만 요구되던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모든 사람에게 인간적인 덕목으로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때로 소통과 공감은 기득권을 가진 계층의 허위의식으로 기능할 수 있다. 사회 지도층은 자발적으로 소외된 계층들에게 관용과 자비를 베푼다. 그것은 자발적인 선택의 문제이지 법적 의무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에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선행은 항상 철회될 수 있다. 조건에 따라 철회될 수 있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란 가진 자가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허영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소통과 공감은 인간이라면 반드시 추구해야만 하는 가치라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소통과 공감이 부재한 사회에 그 누가 살고 싶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이런 중요한 가치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나 경제적 상황에 따라 철회돼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윤리적 행위를 법적 의무로 제도화하는 것도 윤리의 이념에 어울리지 않는다. 윤리란 자발적으로 추구될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통과 공감이 개인의 필요에 따라 철회돼서도 안 되고 법적으로 강제돼서도 안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소통과 공감을 지향하는 인간과 사회를 꿈꿀 수 있을까? 그래서 심재(心齋)라는 호로 더 유명한 왕간(王艮, 1483-1540)이란 철학자가 중요하다. 그는 미꾸라지 우화를 통해 진정한 소통과 공감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도를 얻으려는 사람이 어느 날 우연히 시장을 지나가게 되었다. 생선가게에서 그는 우연히 드렁허리가 잔뜩 들어 있는 대야를 보았다. 드렁허리들은 서로 얽히고 눌려서 마치 죽은 것처럼 보였다. 바로 그 순간 그는 미꾸라지 한 마리를 보았다. 미꾸라지는 드렁허리들 속에서 나와 아래로 위로, 혹은 좌측에서 우측으로, 혹은 앞으로 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쉬지 않고 생생하게 움직이는 것이 마치 신묘한 용과 같았다. 그러자 드렁허리들은 몸을 움직이고 기운이 통해서 ‘삶의 의지[生意]’를 회복하게 되었다. -<왕심재전집 「추선설鰍說」>
공자(孔子, BC551-BC479) 이래로 동양 전통에서는 소통과 공감을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을 ‘도(道)’라고 불렀다. 내가 타자에 이른 길 혹은 타자가 내게 이르는 길, 그러니까 공동체가 소통과 공감으로 움직일 수 있는 길을 동양의 현인들은 집요하게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왕간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것은 도를 얻으려는 사람, 즉 ‘도인(道人)’이 어느 날 시장에서 미꾸라지를 통해 소통과 공감의 도를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다. 드렁허리라는 물고기 이름을 처음 들어본 사람도 많을 것이다. 드렁허리는 뱀장어와 비슷하지만 사실 뱀과 비슷하게 생긴 동아시아에서 많이 발견되는 민물고기다. 시장을 한가하게 거닐다가 도인은 드렁허리가 가득 든 대야를 보게 된다.
좁은 대야에 드렁허리들이 너무 많이 있었나 보다. 좁고 물도 부족해서인지 드렁허리들은 마치 죽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 도인은 여기서 소통과 공감이 부재한 사회를 보았을 것이다. 답답하고 막힌 사회, 그래서 모든 개인들이 죽은 듯이 생기를 잃어버린 사회에 어떻게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까? 갑갑한 마음으로 대야 안을 보다가 그는 미꾸라지 한 마리를 보게 된다. 한 마리의 미꾸라지가 죽은 듯 포개져있는 드렁허리들의 틈 사이로 마치 용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죽은 줄 알았던 드렁허리들은 미꾸라지의 활력과 생기를 받아서인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죽은 듯이 정체되고 막혀있던 대야 안에는 완연 생기가 넘실거리게 된 것이다.
도인은 미꾸라지 한 마리를 통해 소통과 공감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현장을 목도하게 된 셈이다. 이어서 도인은 되묻기 시작한다. 소통과 공감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우리는 소통과 공감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이렇게 도인은 자신이 그렇게도 꿈꾸었던 도에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드렁허리들의 몸을 움직이도록 하고 그들의 기운을 소통시키고 그들의 삶의 의지를 회복시킨 것은 모두 미꾸라지의 공이었다. 미꾸라지가 즐겁게 움직인 이유는 드렁허리들을 동정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드렁허리들의 보답을 바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단지 미꾸라지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그렇게 했을 뿐이다. -<왕심재전집 「추선설鰍說」>
분명 미꾸라지는 자신의 움직임으로 드렁허리들의 삶의 기운과 의지를 되살려놓았다. 도인은 숙고한다. 미꾸라지가 드렁허리 사이에서 즐겁게 헤엄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말대로 미꾸라지는 드렁허리들을 동정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드렁허리들로부터 보답을 받으려는 생각에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냥 미꾸라지는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싶은 자신의 본성에 충실했을 뿐이다. 도인의 말을 통해 왕간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려주고 있다. 소통과 공감은 동정심이나 혹은 일체의 보답 의식으로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왕간은 확신한다. 우리가 자연스러운 삶을 가장 즐겁게 영위할 때 소통과 공감은 기대하지 않아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사실 동정심은 다른 감정에 비할 데 없이 훌륭한 감정이다. 그렇지만 동정심은 자신과 가깝거나 유사한 사람에게만 향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과 무관한 타인이 병에 걸렸을 때보다 자신이 아는 사람이 병으로 고통스러워할 때, 우리가 더 강한 동정심을 느끼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결국 제한된 범위에서 소통과 공감의 동력일 수 있지만, 동정심은 전체 인간 사회에서는 오히려 소통과 공감의 장애물로 기능할 수도 있다. 보답 의식은 동정심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보답 의식을 가지고 누군가를 돕는다면, 우리는 어느 순간 상대방과 소통하고 공감하려는 시도 자체를 접을 수도 있다. 마음을 다해 도와주었지만 상대방이 그 사실에 별다른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을 수 있다. 이 경우 보답 의식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선행을 지속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미꾸라지가 드렁허리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모습에서 왕간은 현대인이 하기 힘든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소통과 공감은 개인의 사적인 감정이나 의식으로부터 달성될 수 없으며, 오직 자신의 본성에 충실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 낙관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간의 본성을 낙관하지 않고서 어떻게 우리가 소통과 공감을 꿈꿀 수 있겠는가? 인간의 본성에 부합되지 않은 세계를 어떻게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는 의식적인 노력만으로 소통과 공감의 세계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의식적인 노력은 어느 순간 우리를 지치게 하고 무디게 만들 수 있다. 왕간이 걱정했던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지속 가능한 소통과 공감의 세계를 꿈꾸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자신의 삶과 자신의 내면을 더 치열하게 성찰해야 한다. 타인과 공감하며 공존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본성에 부합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까지 말이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세계에 삶의 의지를 가져다주는 즐거운 미꾸라지가 될 수 있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연세대 철학과에서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출판기획사 문사철의 기획위원,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철학 VS 철학>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 <상처받지 않을 권리>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