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ure for CEO - '논어와 창조, 예술'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공연
편집자주 기업 경영에 인문학적 소양이 강조되는 시대입니다. 컨베이어벨트로 상징되는 대량생산과 원가절감의 시대는 저물고 있습니다. 이제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고객을 감동시키는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 수 없다는 공감대가 빠르게 형성돼 가고 있습니다. 특히 경영학계와 기업인들 사이에서 한국 사회의 근간을 이뤄온 유교사상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DBR은 SK아트센터 나비와 CWPC서평(徐評)이 공동 주최한 최고경영자 교육 과정인 ‘문화와 경영’ 프로그램(주임교수 서진영)을 지상 중계합니다. 제2부 프로그램인 ‘논어(論語)와 창조, 예술’ 과정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강연 내용을 요약합니다.
※이 강연의 정리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이지은(숙명여대 영어영문학과 4학년) 씨와 이영호(KAIST 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미디어 문명의 역사
미디어(media)란 나와 세상을 연결시켜주는 매개체를 말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디지털 미디어뿐 아니라 문자, 책, 그림, 음성, 손짓, 영상, 심지어 인간의 안구도 하나의 미디어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안구는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어서 파충류나 다른 생명체들과는 다른 형태의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미디어 문명은 이미지(우상)의 시대, 텍스트의 시대, 그리고 기술적 형상의 시대로 발전해왔다. 각각의 시대로 발전하는데 두 번의 전환점이 있었다. 그 첫 번째는 바로 기원전 1500년경에 있었던 알파벳의 발명이다. 알파벳은 다른 문자와는 구별되는 중요한 점이 있다. 특히 동양의 한자와는 차이가 크다. 예를 들어 남자라는 단어는 한자로 男이라 쓸 수 있다. 이는 밭(田)에서 힘(力)을 쓰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다. 즉, 글자가 지칭하는 바와 그림이 지칭하는 바가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아날로거스(analogous·유사한)’하다고 말한다. 반면 영어단어 ‘man’을 보자. 남자와 관련된 어떠한 성격도 이 글자만 보고는 유추해낼 수 없다.
왜 그럴까? 기원전 1500년경 지중해 연안에서 무역을 했던 페니키아 상인들이 알파벳을 발명했다. 이들은 종교의식에 사용될 제물을 누가 얼만큼 가져오는가를 기록하는 데 문자를 썼다고 한다. 알파벳은 셈을 하기 위한 상인들의 문자였고 그래서 객관화, 추상화의 성격이 있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알파벳의 발명과 함께 텍스트의 시대가 열렸다. 이후 서기 1500년경 구텐베르그의 금속활자가 퍼져나가면서 텍스트 시대가 더욱 확산됐고 지적 공동체가 생겨났으며 과학과 기술이 발전했다.
미디어 문명사의 두 번째 전환점은 전기의 발명이다. 전기의 발명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을 바꿔놓은 획기적인 사건이다. 특히 조명장치의 발명으로 밤에 일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시간에 대한 개념이 바뀌었으며 전보 등 통신기술의 발전으로 공간적 거리는 급격히 짧아졌다. 사진의 발명 또한 획기적이라 할 수 있겠다. 사람이 손으로 직접 그림을 그렸던 과거 그림시대와는 달리 사진은 내가 모든 이미지를 제어하지 못한다. 사람의 눈으로 렌즈를 들여다보면서 사진을 찍는다 해도 사진기에서 찍혀 나오는 이미지는 눈에 비친 이미지와는 다르다. 사진은 인간과 기계의 합작이며, 그래서 ‘기술적 형상’이라고 불린다. 영화도 이와 비슷하다. 영화 안에서는 감독이 마음대로 시간과 공간을 조작할 수 있다.
이 시기 즈음하여 과학에서도 현대과학이 시작되며 비슷한 변화가 생겼다. 뉴턴(Newton)으로 대표되는 과거의 과학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확정적이었다. 수식과 공식에다가 무엇을 집어 넣으면 그에 대한 답이 딱 나오는 학문이 과학이었다. 하지만 맥스웰(Maxwell)의 전기이론과 전자가속기의 등장으로 현대과학의 판도는 바뀌었다. 전자는 어떨 때는 알갱이의 성질을 갖지만 어떨 때는 파동의 성질을 갖는다. 심지어 양자물리학에 따르면 전자 알갱이는 관찰자가 볼 때와 안 볼 때 다르게 행동한다. 이렇게 시간에 따라, 심지어 관찰자의 관찰 여부에 따라 형태를 달리하는 전자의 모습은 세상이 예전보다 훨씬 불확실해졌음을 보여준다. 이제는 아예 카오스 시대라는 말을 한다.
‘개념 없다’ vs. ‘꼰대’
다시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차근차근 살펴보자. 우선 그림의 시대는 상상, 마술, 그리고 신화의 세계였다. 그림에 대해 여러 가지 다양하고 풍요로운 해석이 가능했으며 시간 또한 순환적이었다. 그림, 즉 이미지는 가슴이 느끼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미지에는 뭔지 모를 신비로움과 마술적인 요소가 있으며 그 안에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풍요로움이 있다. 이러한 해석의 풍요로움 가운데 실 하나를 잡아 줄을 세우는 것을 텍스트(‘옷감을 짜다’라는 뜻의 라틴어 texere에서 유래)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태양, 남자, 여자, 강아지가 그려진 그림을 생각해보자. 그림 그 자체로는 해석의 풍요로움이 있다. 그런데 만일 이 그림들에 순서를 주어 ‘해가 떴고 남자가 강아지를 찾으러 나갔는데 여자를 만났다’라고 말하면 이것은 텍스트가 된다. 이처럼 텍스트에는 순서, 이유, 인과가 있으며 논리적이고 개념적이다.
이러한 텍스트의 세계는 코스모스(cosmos), 즉 질서의 세계이며 역사의 시대다. 모세가 텍스트인 십계명을 받았다는 때도 이 즈음이다. 이와 함께 우상시대의 신성함은 사라지고 역사가 시작된다. 우리의 생각구조는 이렇게 ‘앞이 있고 뒤가 있고, 처음이 있고 마지막이 있다’는 식이다. 텍스트가 없으면 ‘개념이 없다’고 말한다. 반대로 모든 일의 텍스트를 따지는 사람은 ‘꼰대’라고 말한다. 이념,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개념에서 나왔다. 학교, 국가도 이렇게 생긴다.
이에 반해 텍스트가 기술적 형상이 되는 두 번째 전환은 앞서 말한 그림에서 텍스트로의 변화와는 또 다른 프로세스를 지니고 있다. 이전 텍스트 시대에는 ‘개념’이 있었다면 기술적 형상에서는 ‘징후’로 바뀐다.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와의 갈등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기성세대는 텍스트 중심의 사고를 한다. 낱낱이 밝히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기성세대에게 젊은이들은 개념이 없어 보이고 젊은이들은 기성세대가 꼰대로 보인다. 젊은이들은 본능적으로 진실이 단 한 줄의 실로 꿰어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몸으로 느낀다. 물론 그들은 설명은 잘 못한다. 지금의 미디어 환경이 그들의 의식구조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현상을 이렇게 봐도 되고 저렇게 봐도 된다고 보는 것이다. 또 기술적 형상의 세계는 ‘역사’가 아니라 ‘기획(storytelling)’의 세계다. 젊은 세대는 역사라는 것을 억지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누군가의 억지를 들어야 할 바에는 이왕이면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달라고 말한다.
이것은 코스모스(cosmos)에서 카오스(chaos)로의 변화이기도 하다. 권위는 없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우리가 조작할 수 있는 카오스다. 우리의 손끝으로 조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술적 형상시대는 ‘성스러움이 배제된 조작 가능한 카오스’의 시대라 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트위터 같은 것으로 메시지가 확 퍼지는 현상이 있다. 송출자가 불특정 다수에게 메시지를 쏘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호화롭지만 근본적으로는 단조로움이 있다. 가장 작고 간단한 양의 정보만을 쏘기 때문이다.
신세대형 커뮤니케이션도 한계가 있다
이렇게 ‘징후’형 커뮤니케이션인 개인 미디어가 퍼져나가는 것에 대해 일부는 ‘석기시대적 수다의 전 지구적 확산’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텍스트시대에는 ‘담론’이 있었지만 그것이 이제는 수다의 수준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미디어 학자 빌렘 플루서(Vilem Flusser)는 “역사가 있기 때문에 철학도 있고 혁명과 휴머니즘도 있기 마련인데 앞으로는 혁명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혁명은 현실세계에 대한 불만만 가지고는, 징후만 가지고는 할 수 없다. 혁명이라면 ‘이런 세상이 온다’는 비전, 개념을 제시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고 그냥 촛불만 들고 나오는 것이다. 자스민혁명을 보자. 개인미디어의 힘으로 사람들이 힘을 모아 세상을 뒤집어 엎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그런데 그 후의 대책이 없다.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두고 니체가 이미 1860년대에 예고한 바가 있다. 그는 “만인은 매우 평등하고, 매우 미천하고, 모나지 않고, 매우 붙임성 있으며, 매우 지루하다. 미천하고 연약하고 희미한 만족감이 만인들에게 골고루 퍼져 있다”라고 했다. 전통적인 텍스트형 커뮤니케이션의 모델에서는 벽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벽 안에서 송신자는 수신자들의 아이덴티티를 잘 알고 있으며 수신자들은 송신자에게 피드백을 줄 수 있다. 이러한 과정으로 텍스트형 담론이 형성된다. 이에 반해 전자시대형 커뮤니케이션 모델에서는 벽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한 사람이 말을 하면 그 메시지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텍스트 시대에는 개념 있고 똑똑한 사람이 각광받았다. 전자시대에는 반대로 다감각적이고 공감각적인, 다소 산만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로고스(logos)의 시대에서 미토스(mythos)와 유희의 시대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는 ‘진리는 나의 빛’ 같은 얘기를 하면 ‘구닥다리’라는 얘기를 듣는다. 이러한 시대에서는 모든 것이 ‘나’에게로 온다. 핸드폰 같은 도구들을 이용해 과거 시간적, 공간적으로 멀리 있던 모든 것들이 나에게로 응축된다. 하지만 막상 ‘나’ 자신을 들여다보면 자아정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밖으로는 한없이 뻗어나가는데 정작 자신의 내면에는 불안이 일게 된다. 불안의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텍스트 시대에 가지고 있던 ‘개념’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할 수 없을 것도 같아서 쉽게 뿌리내리지 못하는 것, 그렇게 끊임없이 부유하는 것이 오늘날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한계를 극복하는 소셜미디어의 진화
그렇다면 디지털이라는 건 판도라의 박스에 불과한 걸까? 요즘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인류에게는 정말 희망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컴퓨터게임 때문에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밥상에 앉아서 스마트폰만 만지다가 가족이 해체되기도 한다. 그런데 다행스럽고 신기하게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안의 또 다른, 몰랐던 면이 드러난다. 당대의 기술과 신기술이 접목을 해서 또 다른 문명을 만들어내고, 썩어가는 문명의 어느 또 다른 귀퉁이에서 새로운 문명이 나온다. 이런 것이 계속되는 것이 인간의 역사다.
디지털 미디어 역시 마찬가지다. 혼돈의 세계 속에서도 재미있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국의 사회학자 두 명이 10년간 연구해 <문화창조자>라는 책을 냈다. 이에 따르면 미국과 유럽에서는 인구의 4분의 1이 신자유주의, 성장, 물질만능주의 같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들은 지속 가능한 삶, 환경, 이타성, 공동체, 자원봉사, 자연친화, 창조성 등의 가치를 추구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미디어 분야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다음의 예를 보자.
바르셀로나의 Canal Accessible이라는 프로젝트가 있다. 작가 두 명이 시 곳곳을 다니면서 장애인이 다니기 불편한 곳을 지도 위에 빨간 점으로 표시했다. 이 작품 때문에 시에서 나서서 이런 시설들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는 ‘V Corea’라는 소셜 웹 전문가 그룹이 있다. 일종의 교육 사이트인데 특정한 조직구조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끝나는지 자기들도 모르는 네트워크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실명을 쓴다. 주로 오프라인에서 IT와 관련된 교육을 하는데 초보적인 것부터 IT 관련 벤처를 만드는 법까지 수업의 레벨이 다양하다. 또 모든 게 공짜고 모든 것이 자원봉사다. 3500명 정도 되는 회원들은 자기가 누구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페이스북을 통해 밝혀야 한다. 프로필 사진도 정면 사진만 써야 한다. 평판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그룹에서는 내가 얼마나 봉사했는가가 내 평판이 된다.
이런 그룹에서는 어떤 새로운 걸 물어보면 누군가 금방 답을 해주고 그 답은 매우 신뢰할 만하다. 모든 게 실명이고 서로서로를 다 알기 때문이다. 교육만 하는 게 아니라 가끔 출판도 한다. 소셜 퍼블리싱이라고 하는 형태다. 누군가 어떤 제목을 올리면 그동안에 그 주제에 대해 생각했던 사람들이 글을 올린다. 보통 일주일 정도면 책이 한 권 나온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자기 영역도 따로 없고 기 싸움도 없다. 처음 만나도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준다. 굉장히 유기적인 조직이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서 사람 간의 신뢰가 생기고 이것이 디지털로 증폭이 돼서 더 많은 사람에게 선영향을 끼치는 그런 사례다.
‘디지털’ 하면 흔히 떠올리는 건 무한경쟁, 속도경쟁, 승자독식 같은 말이다. 이런 것이 지속가능성, 스마트, 소셜 같은 것으로 변화한다. 물론 대다수가 그런 건 아니다. 외국의 경우도 이런 사람들은 4분의 1에 불과하다니 아마 우리나라는 더 적을 것이다. 하지만 몸은 못해도 생각은 그렇게 하는 사람은 훨씬 많다. 경쟁구조 속에 몸담고 있어도 마음은 항상 다른 곳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소셜네트워크의 역할이 중요하다.
페이스북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뭘까. 페이스북에는 사람이 나온다. 페이스북에서는 처음 한두 번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계속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안 믿게 된다. 실명과 얼굴이 달려 있다는 것이 페이스북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이다. 즉 인간 자체가 미디어다. 사람을 미디어로, 사람 사이의 미디어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 익명이 아닌, 진짜 내가 내 얼굴을 드러내서 나왔을 때 그런 나를 사람들은 열망하게 된다.
사실 디지털시대 이전에도 인간은 아주 가깝게 연결돼 있었다. 지구상의 누구라도 6단계의 네트워크만 거치면 서로 아는 사람이라는 ‘6단계 이론’도 있었다. 완전히 남남이었던 사람들이 모바일 기술로 연결되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은 그대로인데 단지 이 기기를 통해서 연결성을 발견해가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역사의 종말은 새로운 인간의 시작이다.
정리=조진서 기자 [email protected]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은 윌리엄앤메리대에서 경제학 학사를, 스탠퍼드대에서 교육학 석사를 취득했다. 경희대, 중국 칭화대, 서울예대 등에서 가르쳤고 2010년부터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겸임교수, 칭화대 예술공학위원회 이사로 일하고 있다. 또한 통섭인재양성소 ‘타작마당’을 최근 개소해 학제 간 벽을 허물고 창조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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