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키루스 대왕은 페르시아제국의 실질적 설립자다. 정복전에 나서기 전 그는 당시 활과 창을 활용해 원거리 전투에 주력하던 기존 전술 개혁에 나섰다. 그가 주목한 건 바로 백병전이었다. 적의 사격을 뚫고 적 대형 앞에까지 가서 몸으로 부딪히는 단병접전은 그 자체로 공포스러운 방식이었다. 병사들은 기존 원거리 전투 방식에서 백병전으로 바꿔야 한다는 키루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키루스는 한쪽에는 몽둥이를 들려주고 다른 한쪽은 진흙덩이를 던지게 하는 모의 전투 훈련을 통해 백병전에 대한 병사들의 두려움을 해소시켰다. 한발 더 나아가 말이라곤 타 본적도 없는 병사들에게 말 타는 법을 익히도록 했다. 도전과 성취의 쾌감을 맛본 키루스의 병사들은 기꺼이 기병 모집에 자원했다. 키루스는 백병전을 무서워하는 경보병을 근접 전투부대로 변화시켰고 산악에서 자란 민족에게 기마술을 가르쳐 평원을 정복, 페르시아제국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키루스 대왕은 페르시아제국의 실질적 설립자다. 페르시아는 지금의 페르시아만 연안 시리아 산지에 있던 가난하고 작은 나라였다. 키루스는 리디아(소아시아)와 메디아, 메소포타미아(이라크)를 차례로 정복하고 서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지나 인도에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리스의 전술가이자 역사가였던 크세노폰은 키루스를 제왕과 리더십의 모범으로 극찬하고 그의 일대기를 정리한 <키로파에디아>를 저술했다. 이 책이 진짜 키루스의 전기인지, 키루스를 모델로 한 크세노폰의 역사소설 내지는 계몽소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무래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키루스의 실화든, 크세노폰의 창작이든 이 내용이 충분한 역사적 근거와 사실적 지혜를 담고 있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효율을 높이는 일차적 요소는 도전과 용기
소수로 다수를 격파하기 위해 키루스는 단위 전투력과 효율성을 높이는 전투방식을 모색했다. 전통적 이론과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나 기능성과 효율성이라는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 분석하는 게 키루스의 커다란 장점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병전을 분석한 키루스가 찾아낸 대안이 백병전이었다.
그리스는 중장갑을 하고 방패와 창으로 대결하는 백병전술이 발달했다.중동지역은 경보병 위주의 군대가 투창과 활을 사용해 싸우는 원거리 전투를 선호했다. 하지만 투척전과 사격전은 병력이 많은 군대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전투방식이었다.
키루스는 원거리 전투 대신 백병전에 주목했다. 단병접전은 접전지역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군대가 유리하다. 원거리 전투에서는 모든 병력이 사격에 가담할 수 있지만 백병전이 벌어지는 동안 뒤에 있는 병사는 기다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다수의 적을 각개격파하기에 용이하다. 그러나 백병전은 누구에게나 공포스러운 전투방식이다. 적의 사격을 뚫고 적 대형 앞에까지 접근하는 것도 부담스럽다. 키루스는 장교에겐 백병전이 적을 살상할 확률이 뛰어나다고, 병사들에게는 투창병과 궁수에게 돌격해 단병접전을 벌이는 게 오히려 죽을 확률이 적다며 설득했지만 말로 납득시킬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키루스는 독특한 훈련방식을 고안해 낸다. 병사들을 두 패로 나눠서 모의전투를 벌이도록 했다. 한쪽에게는 몽둥이를 들려주고 다른 한쪽은 진흙덩이를 던지게 했다. 진흙에 맞아봤자 별로 아프지 않으니 몽둥이부대는 용감하게 돌격해서 상대를 두들겨 패고 승리를 거뒀다. 말도 안 되는 불공평한 전투였고 병사들 자신이 엉터리 전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병사들의 가슴속에는 백병전에 대한 자신감이 솟구쳤다. 나무에 오르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과실을 따게 하려면 먼저 과실의 달콤한 맛을 보게 하라는 방식이다. 키루스가 병사들에게 먼저 가르친 것은 백병전의 효용성이 아니라 도전의 가치와 도전 성취의 쾌감이었다.
모의전이 끝나자 키루스는 승리한 병사들에게 물었다. “진흙공격이 어떻던가?” 병사들에게서 “피하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적에게 근접했을 때 마지막 한번의 투척이 위험했습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진흙공격은 원거리에서는 투척공격을 쉽게 피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실제 위험한 순간은 적에게 최고로 근접했을 때, 바로 그때 날아오는 단 한번의 투척이란 사실을 병사들이 깨닫게 된 게 가장 큰 성과였다. 책에는 더 이상 설명이 없지만 키루스군은 그 마지막 한번의 투척을 피하는 기술을 집중 훈련했을 것이다. 덕분에 첫번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그런데 연속되는 승리에도 불구하고 키루스 병사들은 소득이 적었다. 그들은 산악지대 출신이라 말 타는 법을 몰랐는데 적을 추격하고 전리품을 획득하는 건 기병이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한계와 좌절을 체감하게 되자 키루스는 더 대담한 제안을 한다. “말 타는 법을 배워 기병이 되어보자”는 것이었다. 뒤늦게 기마술을 배우는 건 정말 위험하고 힘든 일이다. 역사적으로도 유래가 거의 없다. 하지만 한번 도전과 성취의 쾌감을 맛본 키루스의 병사들은 기꺼이 기병모집에 자원했다. 병사들은 소득을 높일 수 있었고 키루스는 기병을 갖춤으로써 더욱 강력하고 다양한 전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효율성과 기능성
키루스의 부대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진출하자 신바빌로니아 왕국(‘키로파에디아’에서는 아시리아라고 기록돼 있다. 그것은 이 지역이 옛날 관습에 따라 여전히 아시리아로 불렸던 탓이다)은 이집트까지 끌어들여 대군을 편성했다. 바빌로니아 군대는 키루스 군의 10배가 넘는 병력이었다. 키루스는 이들과 싸우려면 또 다른 혁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무기가 전차였다. 전차는 가장 오래된 무기의 하나다. 그러나 덕분에 기원전 6세기에는 이미 고물이 돼 있었다. 기병에 비해 기동성이 크게 떨어지고 지형 제약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나 효율성에 주목했던 키루스는 전차의 위상이 추락한 이유 역시 ‘효율적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독특한 결론을 내린다.
고대의 전차는 한 명이 운전하면 동승한 한두 명의 전투병이 활과 투창으로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운전병은 전투를 하지 못하니까 전투병 1명을 낭비하는 셈이 된다. 또 달리는 전차에서 쏘는 화살은 살상확률도 떨어진다. 인적 효율성과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 키루스는 이전보다 크고 무거운 전차를 고안한다. 전차병에게 갑옷을 입히고 전차바퀴에 창날을, 몸체에는 낫을 달았다. 전차바퀴에 달린 창날로 적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게 되므로 살상력은 높아지고 방호력도 높아져서 운전병을 보호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운전병은 전투병이 됐고 키루스 부대의 파괴력은 배가됐다.
기원전 539년 최후의 결전이 시작됐다. 키루스는 대형에도 변화를 줬다. 소수가 다수를 상대하려면 효율성을 높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동력과 집중력을 높여야 한다. 키루스는 단위부대를 작고 슬림하게 만들고 서로 가까이 붙여 집중타격과 상호지원을 용이하게 했다. 이것은 나중에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정복할 때도 유용하게 써먹었던 전술이다.
그러나 바빌로니아군은 대군의 장점을 살린답시고 단위부대는 크게 만들고 부대는 넓게 벌렸다. 이것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쟁사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대표적인 실수다. 전쟁사에 회자되는 원칙이 적의 약점을 공략하고 자신의 장점은 극대화하라는 것이다. 흔히 병력, 규모, 자본이 우위에 있는 집단들이 이 충고를 받아들인답시고 물량공세로 나가거나 외형을 키운다. 이것은 효율을 떨어트리고 심한 경우 극악하게 저하된 효율은 1만의 군대가 100명의 기능밖에 못하게 함으로써 규모의 우위라는 장점마저 잡아먹어 버린다.
바빌로니아의 전투방식이 꼭 이랬다. 그들은 키루스 군을 삼면에서 포위하며 들어왔다. 하늘에서 보면 압도적인 군세를 자랑했지만 대형이 너무 커서 뒤에 있는 병사들은 딱히 할 일이 없었고 부대 간 거리는 너무 멀어져 효과적인 상호지원이 불가능했다. 진흙덩이를 맞으며 백병능력을 키웠던 키루스 군은 병력의 열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적과 부딪혔다. 적이 밀리기 시작하자 작은 대형이 주는 신속성을 십분 활용해 키루스는 대형을 또 한번 분리했다. 대군 앞에서 가뜩이나 적은 병력을 분리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만 이 역시 외형상의 규모가 아니라 효율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차이였다. 키루스 군은 둘로 나뉘어 적의 양 측면을 동시에 공략했다. 협공을 당한 적은 더욱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뒤쪽에 있던 바빌론병사들은 전투에 참가할 수도 없었고 아군이 죽는 것을 지켜보다 공포심만 커져갔다. 패닉 상태가 된 그들은 결국 도주해버렸다.
키루스 군 우익은 이렇게 승리했지만 이집트 군과 대적한 좌익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좌익 쪽 이집트 군 병력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이집트 군은 이국 땅에서 싸우므로 달아날 곳도 없었다. 그래서 전군이 이탈 없이 단단히 뭉쳐 있었다. 이집트 군은 방패가 크고 창이 길어 공격력은 약해도 수비가 강했다. 전차부대가 돌입해서 적을 난도질했지만 병력이 너무 많은 탓에 시체 속에 갇혀 기동 불능상태가 되고 말았다. 우익의 부대가 좌익의 전투에 가세했지만, 그래도 이집트 군은 악착같이 버텼다. 이집트 군이 승리할 가능성은 없지만 그들을 패배시킬 수도 없는 묘한 상태가 지속됐다.
이때 키루스의 비밀무기가 다시 한번 등장한다. 공성탑이었다. 공성탑은 성을 공격할 때 쓰는 무기지만 키루스는 공성탑을 8마리의 소가 끄는 수레에 실어 야전에 투입했다. 보통 3층에서 4층 정도인 공성탑에는 한 층당 20명의 궁수가 배치됐다. 빽빽하게 뭉쳐 있는 이집트군은 공성탑에서 보면 너무나 멋진, 그야말로 환상적인 표적이었다. 이집트 군은 방패로 화살을 막으려고 했지만 화살이 위에서 아래로 쏟아졌기 때문에 막을 수가 없었다. 방패를 들면 전방에서 가해지는 공격에 또 무방비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이집트 군은 항복했고 키루스는 중동의 패자가 된다.
키루스의 진정한 교훈
<키로파에디아>의 내용은 겉으로 보면 키루스가 작고 가난한 나라에서 열세인 병력을 가지고 어떻게 훨씬 강한 그의 적들을 물리쳤는가에 집중돼 있다. 키루스는 현실적이고 효율을 추구하는 실용적 사고로 수많은 난제를 해결한다. 이것은 많은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소재다. 그러나 그 내면의 진리, 크세노폰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약한 자에게 주는 격려의 메시지가 아니다. ‘키로파에디아’가 시종일관 견지하는 진정한 메시지는 성장하려면 철저하게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기업이 대기업이 되려면 세부적인 경영방식만이 아니라 사물을 보는 관점, 사고하는 방식, 가치는 물론이고 생활방식까지 바꾸어야 한다. 이것은 기업의 성장만이 아니라 개인의 성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혼자만의 변화로는 안 된다. 구성원도 함께 변해야 한다. 이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리더는 구성원을 변화시키는 방법과 요령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한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email protected]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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