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경영학이 본격적으로 학문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눈부시게 발전한 경영학은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실용적 학문이자 현대인의 필수 교양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경영학 100년의 역사에서 길이 남을 고전들과 그 속에 담겨있는 저자들의 통찰력은 무엇인지 가톨릭대 경영학부 이동현 교수가 ‘경영고전읽기’에서 전해드립니다.
기업가정신과 벤처기업의 산실로 유명한 실리콘 밸리(Silicon Valley)는 20세기 초부터 전자·IT산업의 요람으로 자리잡았다. 1970년대 이후 반도체와 컴퓨터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실리콘 밸리는 다시 한번 첨단기술과 벤처기업의 메카로 각광받았다. 특히 1980년 실리콘 밸리의 신생기업이었던 애플 컴퓨터의 성공적인 주식시장 상장으로 벤처기업들에 자금을 제공해주는 벤처 캐피탈 산업도 급성장했다. 덕분에 실리콘 밸리의 벤처 생태계도 더욱 고도화됐다.
하지만 1980년대 벤처산업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경영이론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부족했다. 주류 경영이론은 대부분 제조업 기반의 안정적인 산업을 연구했다. 때문에 첨단기술에 기반을 두고 급변하는 산업에서 활동하는 벤처기업 경영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어려웠다. 첨단기술 산업은 기술적인 불확실성이 매우 높은 시장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신기술이나 신제품이 나타나 기존 시장을 대체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따라서 첨단기술 산업에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경영원칙이 다르게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당장 마케팅만 하더라도 경영대학원에서 널리 가르치는 소비재 마케팅의 원리가 첨단기술 산업에는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다.
제프리 무어(Geoffrey Moore)는 경영학자는 아니었지만 실리콘 밸리에서 경영자, 벤처 캐피탈리스트, 혹은 컨설턴트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체험한 벤처기업만의 독특한 문제를 체계화했다. 1991년 <캐즘을 넘어서(Crossing the Chasm)>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해 첨단기술 마케팅 분야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실리콘 밸리에 위치한 첨단기술 기업의 성장과 실패 과정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이 책에는 저자의 오랜 현장 경험과 지식이 집약돼 있다. 저자가 주장하는 핵심개념은 캐즘(chasm)이다. 캐즘은 본래 지층의 움직임으로 생겨난 골이 깊고 넓은 대단절을 의미하는 지질학적 용어다. 무어는 이 개념을 기술수용주기 모델에 기반을 둔 첨단기술 마케팅에 차용했다.
‘첨단기술 산업의 고객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새로운 기술에 호의적인 고객들로 구성된 초기 시장과 새로운 기술을 수용하는 데 까다로운 고객들로 구성된 주류 시장 사이에 커다란 간격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캐즘은 바로 첨단기술 산업의 벤처기업들이 주류 시장으로 진출할 때 겪게 되는 커다란 난관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초기 시장은 신기술이나 신제품에 호의적인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이들은 새로운 기술이나 제품을 사용하는 데 따르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고서라도 새로운 경험을 원하는 고객들이다. 이들은 뛰어난 기술 자체에 감동하고 높은 성과를 얻기 위해 첨단 기술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실수들을 관대하게 용서한다.
반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류 시장은 초기 시장과 전혀 다른 특성을 갖고 있다. 주류 시장의 고객들은 의심이 많고 보수적이다. 이들은 신기술이나 신제품 자체에 감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신기술과 신제품이 자신의 사업성과에 어떤 효과를 가져 올지 조심스럽게 탐색한다. 때문에 이들은 새로운 기술이나 제품을 선뜻 도입하거나 구매하려 하지 않는다. 신기술을 도입해 성과를 향상시켰다는 확실한 증거나 사례를 요구하고 실수나 오류에도 관대하지 않다.
따라서 캐즘 모델에 따르면 첨단기술 산업의 벤처 경영자들은 초기 시장의 성공에 절대 자만해선 안 된다. 많은 경우 벤처 기업들은 자신만의 최신 기술과 뛰어난 성능의 제품으로 첨단 기술에 호의적인 초기 시장 고객들을 만족시키는 데 성공한다. 벤처 경영자들은 성공했다는 환상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바로 그 다음부터다.
궁극적인 목표 시장이자 규모가 큰 주류 시장의 고객들은 최신 제품보다는 시장에서 표준을 장악한 제품, 뛰어난 성능보다는 안정적인 애프터서비스를 선호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초기 시장에서 효과를 발휘하던 마케팅 전략이 주류 시장에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뛰어난 성능의 신제품을 생산해 초기에 반짝 성장했던 많은 벤처기업들이 주류 시장 공략에 실패해서 파산하는 경우가 실리콘 밸리에 허다했다.
그렇다면 벤처 기업들이 캐즘을 극복하고 주류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하는 방법은 없을까? 무어는 캐즘을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주류 시장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게 급선무라고 충고한다. 벤처 기업들이 초기 시장에서 쌓은 명성과 업적은 다소 도움이 되지만 주류 시장의 고객들을 설득하기엔 역부족이다. 주류 시장의 고객들은 자신과 비슷한 위상이나 규모를 가진 기업들을 비교 대상으로 규정하지, 초기 시장 고객들을 참조 집단(reference)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따라서 초기 시장 성공 사례가 아무리 많아도 주류 시장에서 실적이 없으면 고객을 설득하기 어렵다.
예컨대 전사적자원관리(ERP· Enterprise Resource Planning) 시장에 수많은 벤처 기업들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결국 SAP와 오라클이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주류 시장 고객들을 이미 선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RP 시스템이 잘못되면 금전적인 손해는 물론 사업에 상당한 타격을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확실한 실적도 없는 벤처기업에 프로젝트를 맡기는 기업이 과연 얼마나 될까? 주류 시장 고객들은 믿을 만한 실적을 갖춘 확실한 기업을 선택한다.
다만 이때 벤처기업들은 자금이나 인력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주류 시장 전체를 공략하기보다 목표 세분시장을 정하고 이를 집중 공략하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비록 소규모의 틈새시장이라도, 일단 주류 시장에 작은 성공 사례라도 만들면 그 후 시장을 넓히는 게 상대적으로 용이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문서관리 문제에 관한 솔루션을 보유한 다큐멘텀(Documentum)은 주류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포천 500대 기업 중 제약회사의 규제 관련 업무 담당부서를 표적으로 삼았다. 제약산업에서 규제 관련 업무는 실무자들에게 큰 골칫거리였다. 이들은 국내외 수백 개 규제기관에 제출할 신약승인 신청서를 처리하는 데 매달렸다. 심지어 첫 번째 신청서를 제출하는 데만 꼬박 1년을 허비하기도 했다. 다큐멘텀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획기적인 문서관리 솔루션을 제공했다. 덕분에 상위 40개 기업 중 30여 개 기업이 다큐멘텀의 솔루션을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일단 주류 시장에 교두보를 확보하자 다른 시장으로 쉽게 영업을 확대할 수 있었다. 제약 이외에 화학, 석유, 금융 등 규제 문제가 복잡한 다른 산업의 담당자들도 다큐멘텀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주류 시장을 공략할 때 한 가지 더 고려할 점은 고객들이 단순히 하나의 제품보다는 제품과 관련된 부가 서비스, 예컨대 설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시스템 통합, 교육 및 지원 등을 모두 포함한 완전완비제품(whole product)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PC의 경우 완전완비제품이란 각종 소프트웨어, 모니터, 프린터, 애프터서비스, 사용자 교육 등 다양한 서비스가 결합된 것을 의미했다.
‘통상 기업이 고객에게 한 약속과 실제 제품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이런 차이를 극복하려면 그 제품은 반드시 다양한 서비스와 보조 제품이 결합된 완벽한 제품이어야 한다. 완전완비제품이란 목표 고객이 제품구매 충동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구성을 모두 갖춘 제품이나 서비스로 정의할 수 있다.’
일부 벤처기업들은 특정 제품의 완성도를 높여 완전완비제품 수준까지 투자할 의지나 능력이 없어서 캐즘에서 오랜 기간 정체하다가 시장에서 도태되기도 한다. 따라서 벤처기업들은 자신이 직접 책임질 부분 외에도 협력사나 전략적 파트너들과 제휴에서 고객에게 완전완비제품을 제공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벤처산업은 여전히 기존의 산업 생태계에 새로운 혁신과 성장 동력을 제공하는 활력소 역할을 하고 있다. ‘캐즘을 넘어서’는 바로 이런 벤처기업 경영자들에게 사업을 성장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필자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듀크대 경영대학원 방문 교수로 연구 활동을 벌였다. <MBA 명강의> <경영의 교양을 읽는다: 고전편, 현대편> <깨달음이 있는 경영> <초우량 기업의 조건> 등 다수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 경영학 지식을 다양한 조직에 확산하는 일에 역량을 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