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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솜 전투-검증 없는 신무기, 참혹한 패배 낳다

임용한 | 66호 (2010년 10월 Issue 1)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1916년 7월 1일 오전 7시. 영국군 제4군 11개 사단의 병사들은 축축한 참호 벽에 기대어 곧 떨어질 진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이는 기도문을 되뇌었고, 어떤 이는 잠시 전선을 덮었던 얇은 안개를 녹여 버리며 푸른 하늘을 선사하고 있는 아침 태양을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어떤 이는 묵묵히 아침식사를 했다. 독일군 진영에서 흙과 물이 뒤섞인 포연이 작렬하는 동안 영국군 진지 곳곳에서는 아침식사를 조리하는 하얗고 낭만적인 연기가 피어 올랐다.
 
장교들은 군화를 닦거나, 실제 전투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지만 자신들의 귀중한 장비인 지휘봉 혹은 지팡이를 정성스레 손질했다. 이때까지도 장교문화에는 귀족사회의 유풍이 남아 있어 장교들은 무기를 착용하기보다는 지휘봉 드는 것을 더 선호했다. 싸우는 것은 병사들의 역할이고, 장교들은 그들의 싸움이 우아하고 질서정연하며 효율적인 것이 되도록 이끌고 유지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좀 위화감을 주는 생각이긴 하지만, 잘못된 생각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은 진짜 귀족처럼 병사들의 뒤에서 우아하게 지휘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시대에 뒤처진 낡은 방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진보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장교들은 품위와 지휘봉으로 우아한 전투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구시대적 환상을 버리지 못했다.
 
어떤 병사는 참호 밖으로 뻗어 나온 잠망경을 통해, 어떤 병사는 아예 참호 위에 걸터앉아 3km 밖의 땅에서 작렬하는 엄청난 포화와 연기를 지켜 보았다. 1500문의 포가 1주일 동안 뿜어댄 포격은 사상 유례가 없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한 시간 전부터 시작된 최후의 포격은 어마어마했다. 넓은 평원에 독일군은 보이지도 않았지만, 22km에 달하는 전선의 전 범위에서 동시에 포탄이 작렬했다. 1주일 동안 무한정 떨어지는 포탄은 솜 평원을 물과 진흙이 뒤섞인 구멍투성이 진창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래도 포격은 그치지 않아 그 위로 다시 포탄은 떨어지고 또 떨어져 진흙과 물이 뒤섞인 혼합물을 공중으로 퍼 올렸다. 일주일 간 독일군 진지로 떨어진 포탄은 무려 150만 발이었다. 이 엄청난 포화 아래 살아남을 생명체는 없을 것 같았다. 아니 그러기를 바라야 했다. 그들이 가로질러야 할 평원은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죽음의 달리기
같은 시각, 독일군 병사들은 지하 20m 아래의 벙커에서 숨 막히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깊고 튼튼하게 구축한 대피호는 이론적으로는 포격에 안전하다고 해도 포탄이 주는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폭발이 주는 진탕 효과로 벽이 흔들리고 촛불이 꺼졌다. 심한 경우 흙먼지가 호 안을 채우고 독가스까지 흘러 들었다. 마지막 날이 가까워올수록 충격은 더욱 심해져서 거대한 포탄이 땅에 박히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상으로 나가는 통로는 대부분 막혀 병사들은 쉴새 없이 그것을 다시 파내야 했다.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것은 금새라도 벽이 무너지고, 땅에 매몰될 것 같은 공포스러운 순간이 일주일째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어둡고 매캐한 공포 속에서 장교와 하사관, 고참 병사들은 끊임없이 한가지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었다. 포격이 끝나는 순간 그들은 입구를 막은 흙을 파내고, 지상으로 뛰어 올라가 2선 참호를 지나 1선 참호의 흉벽, 특히 기관총 진지까지 최대한의 속도로 달려야 한다. 당시 독일군의 참호는 매우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1선, 2선의 참호가 있고, 그 뒤에 제일 안전한 깊은 대피호가 있었다. 돌격해오는 영국군을 사격으로 저지하기 위해서는 1선 참호에 설치한 기관총 진지까지 달려가야 했다. 그들이 진지로 달려나가 기관총 진지에 총을 설치하기 전에 영국군이 호의 입구에 도착하면 전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땅 위에서 달려오는 영국군과 땅 밑에서 기어 나오는 독일군 간의 달리기 시합. 신이 하늘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다면 침을 꼴깍거리며 숨을 죽이고 있을 만한 그런 순간이었다. 수십만 명이 동시에 참가하고, 그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죽어 나갈 수 있는 순간이었으니 말이다.
 
전율의 날
매사에 정확한 영국군답게 7시 30분이 되자 전 전선에서 호각 소리가 울렸다. 이어 병사들의 환호성이 길게 울려 퍼졌다. 그것은 악에 받친 돌격의 함성이 아니라 진정 승리의 함성이었다. 병사들은 그렇게 믿고 싶었고, 일부 병사들은 일주일 동안 감행된 엄청난 포격으로 독일군들은 분명 몰살됐거나 심대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참호 밖으로 밀려 나오는 영국 젊은이들의 행렬은 죽음의 달리기라는 표현이 무색하게 느긋했다. 마라톤 경주가 시작되듯 새까맣게 달려 나오는 대신 병사들은 질서정연하게 대형을 형성했다. 완고하고 힘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천천히 독일군 전선을 향해 진격했다.
 
평원은, 적어도 영국군이 진격을 시작한 순간까지는 포연과 영국군 병사들이 던진 연막탄으로 안개가 자욱했다. 조금 진격한 후에야 영국군 병사들은 포격으로 지형이 뒤틀리고 엉망진창이 된 평원을 볼 수 있었다. 좀 더 시야가 또렷해지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1차 세계대전의 상징물처럼 되어 버린 철조망, 독일군 참호 앞에 두껍게 펼쳐놓은 철조망의 숲이 멀쩡했던 것이다.
 
지상에 노출된 철조망조차도 멀쩡했으니 그 뒤에 있는 독일군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대피호를 뚫고 나와 기관총 진지에 도달해 있었다. 기관총이 설치되고, 탄창이 보급대에 걸렸다. 독일군의 기관총 사수들은 모든 병사들 중에서 가장 훈련이 잘 되고 우수했다. 기관총은 1860년대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개발됐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기관총은 성능과 전술에서 확고한 발전을 거듭해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살상무기가 되어 있었다.
 
특히 독일군은 이 기관총 전술에 뛰어났다. 진격해 오는 연합군을 향해 2대의 기관총이 양 측면에서 십자로 사격하면서 킬링 존을 형성했다. 이 전술 자체는 양측에 표준화된 전술이었지만, 거미줄 같이 복잡한 참호망에 돌격선을 파악하고 기관총 진지를 설치하는 기술은 독일군이 최고였다. 이 킬링 존에 들어서면 수백 명의 보병이 전멸하는 것도 한 순간이었다. 어느 중대는 약 30m를 걸어가는 동안 중대가 전멸했다. “어디선가 기관총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주위에 살아 남은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는 식이었다. 7월 1일 하루 동안 영국군에서만 1만9240명이 전사했고, 3만5493명이 부상했다. 하지만 이것은 악몽의 시작일 뿐이었다. 11월 18일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연합군은 총 62만4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독일군의 피해는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45만∼60만 명 정도가 사상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엄청난 희생을 통해 영국군이 진격한 거리는 겨우 12km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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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email protected]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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