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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아우라 상실의 시대

강신주 | 66호 (2010년 10월 Issue 1)


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DBR은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처음으로 프랑스 파리에 갔다 온 친구가 있다. 귀국 환영 겸 카페에서 차를 마시기로 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그의 지겨운 여행담을 들어야 했다.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파리가 너무 보잘 것 없었다고 혀를 찼다. 그렇지만 루브르 박물관에 갔던 경험을 이야기할 때 눈을 반짝였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 모나리자를 직접 보고서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사실 모나리자는 교과서 아니면 교양서적, 심지어는 젊은이들의 티셔츠나 머그잔에도 실려 있을 정도로 익숙한 그림이다. 그렇지만 그는 직접 보지 않았다면 모나리자가 얼마나 위대한 걸작인지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평소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친구가 모나리자를 몰랐을 리 없다. 그런 그가 이렇게 모나리자의 위대함에 찬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 티셔츠, 머그잔에 새겨진 모나리자와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었던 것일까?
 
이런 의문을 가졌다면, 우리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기념비적인 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을 읽을 준비를 갖춘 셈이다. 20세기에 나온 논문 중 벤야민의 논문보다 많이 인용된 것도 없다. 때론 수천 쪽에 달하는 저서보다 천재성과 독창성이 빛나는 한 편의 작은 글이 우리에게 더 깊은 영감을 줄 수도 있다. 이 논문을 모르는 사람도 ‘아우라(Aura)’라는 말은 어디선가 들어보았을 것이다. 아우라는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쓸 때 벤야민이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개념이다. 먼저 이 개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의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이 순간, 이 산, 그리고 이 나뭇가지가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가 숨을 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비슷비슷한 경치를 보면 우리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비록 새로운 경치라고 해도 자주 보았던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떤 날, 그리고 어떤 장소에서 우리는 앞으로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은 풍경에 직면할 때가 있다. 바로 ‘여기 그리고 지금(hic et nunc)’에 있지 않았다면 볼 수 없었던 매혹적인 경치를 만날 때다. 물론 몸과 마음 상태, 시간, 기후, 습도, 채광, 바람의 세기 등등 어느 한 가지라도 빠진다면, 이런 황홀한 경험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웅장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산, 매혹적으로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나를 부르고 있는 느낌이 든다. 벤야민의 말대로 우리에게 그것들은 마치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어느 순간 어떤 사물이나 풍경이 나를 강렬하게 매혹시킬 때, 우리는 그것이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우라를 가진 풍경은 다시는 반복될 수 없을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다시 이곳을 온다고 해도 이런 느낌을 가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서둘러 디지털 카메라로 풍경을 다양한 각도에서 찍으려고 한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곳을 떠나는 차 속에서 사진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무엇인가 빠져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사진 속의 풍경에는 실제 풍경이 가지고 있던 아우라, 다시 말해 숨을 쉬며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이제 책이나 머그잔, 혹은 티셔츠에 새겨진 모나리자와 직접 루브르 박물관에서 직면했던 모나리자의 차이가 분명해지지 않는가? 친구는 루브르에서 그 동안 느끼지 못했던 모나리자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아우라를 확인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보았던 다양한 모나리자들은 아우라가 빠진 시체 같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아름다운 풍경, 거장의 미술작품, 혹은 뛰어난 음악을 복제할 수 있게 됐다. 우리 주변에 손쉽게 복제된 풍경사진, 미술작품, 그리고 실황 연주가 담겨있는 CD 등이 쉽게 발견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풍경사진이나 책에 인쇄된 미술작품, 그리고 CD에서 들리는 음악에는 무엇인가 빠져 있다.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 있었다면 우리가 느낄 수 있었던 아우라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우리가 아우라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복제에서 빠져 있는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현존성을 우리는 아우라(Aura)라는 개념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다. … 복제기술은 복제품을 대량 생산함으로써 일회적 산물을 대량 제조된 산물로서 대치시킨다. 복제기술은 수용자로 하여금 그때그때의 개별적 상황 속에서 복제품과 대면하게 함으로써 그 복제품을 현재화한다. 이 두 과정, 즉 복제품의 대량 생산과 복제품의 현재화는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것을 마구 뒤흔들어 놓았다.
-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루브르 박물관에 하나 밖에 없는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이제 복제기술에 의해 수천, 아니 수억의 모나리자로 세포 분열했다. 모나리자의 희소성, 혹은 다빈치가 오직 한 장만 그렸던 모나리자의 유일성은 근본적으로 훼손됐다. 그렇지만 잊지 말자. 이것은 동시에 복제된 모나리자를 통해 누구나 프랑스 파리에 가지 않고도 모나리자를 즐길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벤야민은 복제된 모나리자들을 부정하고, 모나리자는 오직 하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전통주의자는 아니다. 오히려 그가 강조했던 것은 우리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예술적 조건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과거에 일부 권세가나 재력가만이 배타적으로 향유했던 예술작품을 이제는 일반 대중도 누구나 손쉽고 값싸게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물론 이것에는 아우라 상실이라는 피할 수 없는 대가가 뒤따르지만 말이다.
 
루브르에 직접 가서 모나리자를 보면 자신의 느낌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친구는 카페를 먼저 나갔다. 그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루브르에서 동일한 감동에 빠질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부러운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모나리자가 걸려 있는 루브르 박물관 전시실에서 그는 번개에 맞은 듯 서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 순간 ‘여기 그리고 지금’ 모나리자와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에 전율했을 것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술작품이나 풍경 앞에서 전율할 때가 있다. 그것의 아우라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 순간 우리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고맙게 느낀다. 살아있기 때문에 이런 매혹적인 것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것에서 아우라를 느끼는 순간은 동시에 우리 자신이 행복해지는 순간이다. 모나리자가 아니어도 좋다. 주변의 작은 것에서도 아우라를 느낄 수만 있다면 말이다. 무더운 여름 하늘 위를 떠가는 구름에서도,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에서도, 아니면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에서도 우리는 아우라를 충분히 느낄 수 있으니까.
 
 
 강신주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객원연구원 [email protected]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연세대 철학과에서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망각과 자유: 장자 읽기의 즐거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장자 철학을 조명하고, 철학을 대중화하는 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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