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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3. 전쟁에서 배우는 인재 기용 전략

전쟁사 속의 ‘반골형 지휘관’ 불확실성과 위기를 이겨낸 인재

남보람,이정찬 | 234호 (2017년 10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전쟁사 연구자들이 ‘전쟁의 판도를 바꿨다’고 인정하는 전투에는 어김없이 ‘반골형’ 지휘관이 등장한다. 그들은 주로 자신의 직책은 물론 목숨까지도 잃게 만들 수 있는 상관의 지시마저 거부하고 자신의 경험과 분석에 근거해 현장에서 놀라운 판단을 내렸다. 이러한 반골형 인재가 갖는 특성은 최근 미국이 이라크전과 아프간전쟁에서 뼈저린 실패를 경험한 뒤 펴낸 <작전디자인의 기술과 방법>에서 제시하는 미래형 지휘관의 모습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상황이 급변하는 현대전에서는 민첩성과 적응력을 갖추고 때론 정해진 교범을 깨거나 상관의 지시를 반박하며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리더들이 필요하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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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판도를 바꾼 전투 셋


장면 1) 1912년 10월, 터키 륄레부르가즈
때는 이때다! 신생 불가리아군의 질주

 

터키(당시 오토만제국)가 약해졌다. 유럽 열강은 어부지리를 취할 셈으로 터키와 국경을 맞댄 발칸국을 꼬드겼다. 터키를 포함한 주변 강국의 지배에 신음해오던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는 자주와 복수를 원했다. 소국 몬테네그로는 영토 확장의 야심이 있었다. 이들은 반(反)터키-발칸동맹을 맺고 1912년 10월, 터키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렇게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발칸전쟁(1912∼13)이 시작됐다. 대치와 탐색 속에 소규모 조우전이 몇 번 있은 후 전황은 돌연 화약고가 터진 것처럼 치열해졌다. 특히 1912년 10월 28일부터 11월2일까지 벌어진 륄레부르가즈(Lüleburgaz)전투는 양측의 전사상자만 4만2000명에 달하는 격전이었다. <그림 1> 지도에서 붉은색으로 표시된 곳이 바로 륄레부르가즈다.

 
초전의 선봉은 불가리아였다. 준비되지 않은 터키군을 남으로 밀어내면서 이스탄불로부터 약 200㎞ 떨어진 키르클라렐리(Kırklareli)까지 진격했다. 터키군으로부터 반격이 없자 불가리아군은 10월27일 공격을 재개했다. 양측이 다시 맞붙은 것은 10월29일, 륄레부르가즈(이스탄불 서측 약 150㎞)였다. 흑해, 에게해, 마르마라해를 포함한 발칸반도 남부의 주도권이 이곳에 걸려 있었다.


불가리아군의 기세에 터키군은 계속 밀렸다. 불가리아군은 실전 경험에 기반한 우수한 전술전기를 갖고 있었다. 특히 포병은 정확하고 치명적이었다. 이대로라면 최초 계획대로 불가리아 제1군이 발칸반도 동쪽에서 내려오면서 측면 포위를 시도할 때, 제3군이 정면에서 공격해 터키군을 격멸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험한 지형, 궂은 날씨로 제1군의 남진이 지체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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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어도 준치’ 터키군의 반격에 맞서 황제의 명을 어기고 공격하다

 

터키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불가리아 제3군과 제1군 사이에 발생한 간격으로 역습을 시도했다. 불가리아군 지휘부는 당황했다. 터키군에 돌파를 허용한다면 각개격파 당할 위험이 있었다. 터키 본토로부터 증원군이 도착한다면 발칸동맹군 전체가 철수해야 할지도 몰랐다. 따라서 불가리아군 지휘부는 ‘제3군은 방어로 전환해 현 위치를 고수하고, 제1군은 신속히 측방으로 기동해 터키군을 공격하라’는 요지의 명령을 하달했다.

 
방어 전환 명령을 받은 불가리아 제3군의 사령관은 라드코 디미트리예프(Radko Dimitriev) 장군으로, 러시아-터키 전쟁(1877∼78)과 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1885)에 참전했던 53세의 노장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공세의 템포를 놓치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총사령관인 황제의 명을 어기고 터키군의 공격을 맞받아쳤다. 단순히 감으로 맞대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정면공격을 하는 대신 서쪽으로 주력을 보내 터키군의 측면을 강타하기로 했다. 10월29일 야간의 기습은 효과를 발휘했고 불가리아 제3군은 쉬지 않고 사흘간 터키군을 밀어붙였다.

 
터키군, 600년 만에 발칸반도에서 철수하다


측면이 노출된 터키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여기에 동쪽으로 내려오던 불가리아 제1군까지 가세한다면 터키군은 양 옆구리를 얻어맞을 것이었다. 터키군은 조금씩 후퇴하기 시작했다.
 

디미트리예프 장군은 이 결정적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0월31일 야간, 이번에는 터키군 한가운데를 돌파했다. 옆구리에 훅을 적중시킨 후 비어 있던 얼굴 한가운데 스트레이트를 꽂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터키군은 패닉에 빠졌다. 순식간에 장병 약 2000명이 포로가 될 정도였다. 터키군 주력은 11월2일부로 발칸반도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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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2) 1914년 8월, 독일 굼빈넨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러시아군, 동프로이센으로 진격하다

 

독일군이 1914년 8월3일, 벨기에를 침공했다. 그리고 계속 서유럽으로 진격했다. 18세기 내내 확장과 분열을 반복하던 유럽의 갈등이 마침내 대전(The Great War, 혹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한 것이다. 유럽 정복을 꿈꾸던 독일은 10년 동안 전쟁을 준비했다. (물론 유럽 모든 열강이 그러했다.) 독일군의 기본 계획은 서부(프랑스 방면)를 먼저 기습하고 동부(러시아)를 나중에 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처럼 되지 않았다. 굼벵이처럼 느릴 줄 알았던 러시아군이 2주 만에 동프로이센 쪽으로 군대를 보낸 것이다.

 
러시아군은 8월13일, 동프로이센 국경에 도달했다. 동프로이센에 배치된 독일군은 12개 사단(제8군)에 불과했다. 러시아군은 이곳에 무려 79개 사단을 보냈다. 숫자상으로 거의 8배였다. 러시아는 승리를 자신했다. 러시아 제1군이 북쪽에서, 제2군이 남쪽에서 서진해 독일 제8군을 포위하기로 했다. 그러나 속도가 나지 않았다. 급히 모아 보낸 군대라 훈련 수준이 낮았고 차량을 비롯한 각종 장비도 부족했다. 마주리안(Masurian)호수 일대의 습지 지형도 진격을 더디게 했다.

 
한편 독일 제8군사령부는 8월15일, 예하부대에 ‘섣불리 교전하지 말고 러시아군을 내륙으로 끌어들이면서 시간을 벌라’고 지시했다. 이때 러시아군의 선두는 제1군이었다. 이들이 향하던 방향은 굼빈넨(Gumbinnen)이었다. 동프로이센 지역의 도로가 교차하는 요충지였다. 이곳에는 독일 제1군단이 배치돼 있었다. <그림 3>의 붉은 곳으로 표시된 곳이 굼빈넨이다.

 
“나는 무조건 공격한다”

 
독일 제1군단은 8월17일, 러시아군을 야간 기습했다. 공격하지 말라던 군사령부의 지시를 위반한 것이다. 군단장 헤르만 프랑수아(Hermann von Francois)는 상관의 지시라고 하더라도 타당하지 않으면 따르지 않는 고집쟁이였다. 그는 ‘군대는 공격’이라는 강력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군을 공격하고 싶었고 그래서 공격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시공간에서 공격을 받은 러시아 제1군은 그 자리에 멈췄다. 수적인 우세를 앞세워 느리지만 쉼 없이 전진하던 러시아 대군의 기세가 일순간 사라졌다. 소식을 들은 제2군도 멈췄다. 러시아군은 현 위치에서 상황을 파악하며 전열을 정비했다.


인류 역사에 손꼽히는 전투사 탄생

전쟁사 연구자들은 바로 이 프랑수아 장군의 야간 기습이 동부전선 초기 상황을 결정적으로 바꿔 놓았다고 주장한다. 교전 발생 전의 부대는 통상 속도에 주안을 두고 밀집대형을 유지한 채 이동한다. 그러나 적 포병화력, 보병사격이 예상될 때는 속도를 포기하고 대형을 넓게 펼친다. 독일 제1군단의 기습은 시너지 효과를 냈다. 러시아 제1군과 제2군은 혹시 모를 또 다른 공격에 대비하느라 서로의 간격을 보강하기보다는 자체 방호에 신경을 썼다. 이로 인해 러시아 양군의 간격은 더 벌어졌다. 피습과 정지, 벌어진 간격으로 러시아군은 조급해졌다. 조바심을 내던 러시아군은 공격 시간과 방향이 담긴 계획을 평문으로 전송하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 전문은 8월22일 독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독일군은 호기를 놓치지 않고 공세로 전환해 8월24일부터 29일까지 러시아군을 몰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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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보람

    남보람

    -(현)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세계전쟁사 연구원
    -2011~2016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연구원
    -2012 워싱턴 미국립문서관리청 파견연구원
    -2013 워싱턴 미 육군군사연구소 교환연구원
    -2016 뉴욕 유엔아카이브 파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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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찬[email protected]

    SBS 스포츠에서 재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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