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백성의 세 가지 의무 중 하나인 공납(貢納)은 지역 특산물을 현물로 나라에 바치는 제도다. 그러나 공납은 여러 문제로 인해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안겨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행된 것이 ‘대동법(大同法)’이다. 대동법은 공물을 쌀로 통일해 납부하게 하고 국가가 직접 이를 활용해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는 제도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공납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마련됐다. 그러나 양반 지주층과 방납인들의 반발, 여기에 병자호란 등 외부 변수까지 작용을 하며 시행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편집자주 | 조선사 전문가 김준태 교수가 대동법 시행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시행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에 대한 글을 상, 하편으로 나눠 게재합니다. 조선시대 백성에게는 세 가지 의무가 있었다. 이른바 ‘조용조(租庸調)’라고 불리는데 조(租)는 토지에 대한 세금을 말하고, 용(庸)은 군에 일정 기간 복무하거나 군비를 부담하는 군역(軍役)과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요역(徭役)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조(調)’는 지방의 특산물을 현물로 나라에 바치는 것이다. 흔히 공납(貢納)이라고 부른다.
15세기만 해도 조선 조정은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토지에서 거둔 세금으로 운용했다. 20년마다11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 20년마다 실시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닫기 전국의 경작 가능한 토지 결수22결부(結簿)의 수량이라는 뜻으로 곡식의 수확량을 기준으로 정한 토지의 단위 면적이며 국가에서는 이를 기준으로 조세를 부과했다.
닫기를 측정하는 양전(量田)을 시행하고 토지의 비옥도와 풍흉의 정도를 반영해 전조(田租)를 거뒀다. 그런데 공신(功臣)이나 왕족에게 나눠 준 면세전(免稅田)이 늘어나고, 권력을 가진 양반 지주층이 지속적으로 저항하면서 국가 수입에서 전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었다. 그 자리를 메꾼 것이 백성으로부터 거두는 공납이다. 16세기에 들어서면 이 공납이 전체 재정의 60%를 넘어서게 된다. 왕실이나 중앙 관청의 운영 경비에서 공납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조정에서 공부(貢賦)가 차질 없이 걷힐 수 있도록 지방을 압박한 것은 그 때문이다.
한데 공납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공납의 품목과 수량, 지역별 할당량 등을 적어놓은 문서인 ‘공안(貢案)’에는 공액(貢額)이 고정돼 있다. 만약 어떤 고을에 재해가 일어나 해당 특산물을 바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다른 지역에서 현물을 사와 바쳐야 했다. 또한 예를 들어 통영의 특산물이 굴이라고 해서 통영에 사는 모든 백성이 직접 굴을 채취하는 것은 아니다. 통영에도 농부가 있고 장인(匠人)이 있다. 이들은 시장에서 굴을 사다가 공물로 내야 한다. 한 고을 안에서도 부세 불균형이 발생하는 것이다. 더욱이 중앙에서 요구하는 품질과 규격이 매우 까다로웠고, 조정에서 원하는 시기와 현지에서 생산되는 시기가 맞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더 이상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이 아님에도 여전히 부과되는 예도 있었다. 요컨대 일반 개인이 현물로 맞춰 조달, 납부하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관리나 상인을 통해 대신 납부해 주는 시스템이 생겨났는데 이것이 ‘방납(防納)’이다.
김준태 교수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유학대학 연구교수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왕의 공부』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