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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정조를 통해 본 리더십

명태조 배례 관철한 영조 극단적 강수는 외로움을 부를 뿐…

노혜경 | 197호 (2016년 3월 lssue 2)

Article at a Glance

 

많은 리더들은 반대 의견에 부딪혔을 때 일단 대꾸할 가치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 짓고, 토론할 가치가 있는 의견에 대해서만 대처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영조는 신하들의 어떤 반대 의견에도 호불호를 드러내지 않고 하나하나 대항논리를 제시했다. 이는 신하들로 하여금영조는 언제나 신념이 있고 우리의 의견을 충분히 검토하고 일을 추진한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또한 영조는 자신의 본심을 신하들에게 완전히 드러내놓지 않았다. 진짜 의도를 모호한 채로 남겨뒀기 때문에 신하들은 영조의 약점을 정확히 간파해 반론을 펼칠 수 없었다. 그 결과 영조는 대보단(임진왜란 때 원군을 파병해 준 명나라 신종을 추모하기 위해 쌓은 제단)에서 신종뿐 아니라 의종, 더 나아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을 위해서도 제사를 지내자는 황당한 아이디어를 신하들의 갖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철시킬 수 있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데 중요한 많은 요소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더 부각되고 있는 분야가 바로 외교다. 어느 때보다도 한 나라가 홀로 생존하기 힘든 세상이 됐다. 단순히 국제관계를 넘어서 통상, 무역이라는 더 큰 문제가 버티고 있어서 더더욱 명분과 실리를 적정하게 유지할 수 있는 외교술이 절실한 시대가 됐다.

 

그렇다면 과거 우리의 외교술은 어땠을까. 어떤 사람들은 사대주의로 점철된 역사였다고 하고, 심지어 지금도 사대주의 외교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는 경우를 자주 접하곤 한다. 같은 맥락으로 조선시대 유적 중에서 기억하기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대보단(大報壇)이다.

 

소중화(小中華) 의식의 표상 대보단(大報壇)

 

대보단은 임진왜란 때 원군을 파견해준 명나라 신종을 추모하기 위해 쌓은 제단이다. 한마디로 소중화(小中華) 의식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대보단은 1704(숙종 30) 창덕궁 후원인 금원 옆에 설치됐는데 매년 3월에 제사를 지냈다. 이 제사는 1884년까지 계속 유지됐다. 처음 대보단이 설치될 때 조선에서는 이 사실을 청에 숨기려 했었다. 이미 청나라로 바뀐 중국인데 한족의 나라 명나라 황제를 위해 제사를 지낸다는 사실이 청나라 입장에선 반가울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에서는 이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그다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천하에 이렇게나 예의바른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라고 자부하는 조선을 보고, 청은 자신들과의 외교관계에 있어서도 조선이 예를 다할 거란 믿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대보단의 부작용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생했다. 조선이소중화를 자처하며 주자 성리학의 교리를 지나치게 추종하게 됐고 임금의 명령과 생각마저 그 아래로 두게 된 것이다. 신하들은 임금보다 훨씬 더 위대한 우주와 역사의 진리로 무장한 채 임금을 우습게 보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는 임금이 폭정을 하거나 탐욕을 부릴 때는 진리와 정의를 사수하는 선비정신이 되지만 임금이 개혁을 하거나 변화를 주려고 할 때는 변화와 개혁을 가로막는 철벽이 되기도 했다.

 

왕이 된 지 20년이 지난 영조는 바로 이 철벽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은 명나라 황실을 섬기는 소중화의 표상인 대보단을 헐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랬다면 영조는 아마 엄청난 반발에 부딪혔을 것이고, 오히려 콧대 높은 선비들을 단결시키는 결과만 초래했을 것이다. 뛰어난 정치가였던 영조는 대보단을 헐기보다는 오히려 대보단을 이용했다.

 

‘상대를 설득하려면 상대의 논리로 해라.’ 대단히 중요한 협상의 기술이다. 영조는 이렇게 주장했다. “명나라 황제 중에서 우리를 도와준 황제는 원병을 보내준 신종만이 아니다. 병자호란 때 의종도 원병을 보내주려고 했다.” 그래서 영조는 대보단 제사에 의종의 자리까지 마련해서 거행하도록 했다. 실제로 명나라 의종은 조선에 원병을 보내주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에 해준 게 하나도 없었지만, 영조는 어쨌든 우겨넣었다. 이렇게 신종과 의종 제사에 명분을 만들어 놓은 후 영조는 진짜 카드를 꺼내들었다. 바로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란 카드였다. 명 태조 주원장은 조선에 국호를 내려준 인물인데 영조는 주원장이 조선의 창업에 도움을 주었으니 그 공로를 보답해야 한다는 너무나 그럴싸한 명분을 내걸었다.

 

조정 신하들의 속은 발칵 뒤집혔다. 명분이 애매한 의종도 모자라 명나라 태조까지 대보단 제사에 끼워 넣자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처사라고 했다. 명 태조 주원장은 유능한 황제였지만 중국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었다. 황제가 된 후에 온갖 트집을 잡아 개국공신과 자기 측근을 모조리 숙청했다. 심지어 상소문을 뒤져서빛 광()’이라는 글자를 쓴 사람이 발견되면 자기가 젊었을 때 까까머리 승려였던 것을 비웃는 거라고 트집을 잡아 숙청을 할 정도였다. 3번의 대숙청으로 죽인 사람이 거의 10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런 끔찍한 폭군을 대보단에 모시겠다니 신하들이 반발하는 건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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