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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정조를 통해 본 리더십

淸의 화해 제스처를 술수로 본 조선, 합리적 정조조차 마음을 다 못 열었다

노혜경 | 190호 (2015년 12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1720년 숙종이 승하하자 청나라에서 조선에 조문 사절을 보냈다. 이들은 과거 명나라 사신단과 달리 숙종릉에 직접 가서 조문하겠다고 했다. 청나라에선 직접 그 사람의 무덤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 게 망자(亡者)에 대한 최고의 예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조선 관료들은외교적 결례다” “뇌물을 뜯어내려는 술수다라며 떠들어댔다. 조선 관료들 중 그 누구도 청나라의 문화를 알지 못했고, 당시 조선과의 관계 개선을 원했던 청나라의 정책적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청나라와의 관계를 발전적이고 유익하게 이용하기는커녕 쓸데없는 일에 고민하고 긴장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타인의 행동과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접할 때, 우리는 곧잘 내 기준, 내 관념, 내 이익이라는 안경을 통해 보는 경향이 있다. 특히 상대방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때는 상대의 장점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비하하고 무시하기 일쑤다. 이런 태도는 더 큰 피해를 가져다줄 뿐이다.

 

편집자주

영조와 정조가 다스리던 18세기는 조선 중흥의 시대라 불립니다. 하지만 이런 타이틀은 결코 쉽게 얻어진 게 아닙니다. 노론과 소론 간 권력 투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 즉위한 두 왕은 군왕의 소임이란 특정 당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도탄에 빠져 있는 조선과 백성을 위해 있는 자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당시로선 너무나 혁명적인 선언인 탓에 수많은 방해와 반대에 직면했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지혜와 용기, 끈기로 무장해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어 낸 두 임금, 영조와 정조의 기록을 통해 진정한 리더의 자질에 대한 통찰을 얻어 가시기 바랍니다.

 

조선시대에는 일 년에 한두 번씩 국정이 마비될 때가 있었다. 바로 중국에서 사신단이 도착하는 때였다. 사신이 온다고 하면 호구조사, 내각개편, 편찬사업 등 진행하고 있던 모든 국가적 사업이 일단 정지된다. 세조 때 신숙주는 여진정벌을 준비하려고 함경도에 가 있었는데 사신이 온다고 해서 전쟁 준비를 중단하고 한양으로 돌아온 적도 있을 정도였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흔히 사대주의라며 대놓고 싫어하는 분도 있지만 요즘에도 올림픽이나 엑스포(EXPO), 국가정상회담 등 국제적인 대규모 행사를 치르게 되면 국력이 거기에 집중되곤 한다. 교통 체증을 걱정해 일부 구간을 통제하기도 하고, 자원봉사자를 모집해 행사진행을 보강하기도 하며, 우리의 국력을 보여줄 때라고 대대적인 홍보를 진행하기도 한다.

 

조선, 청나라가 보낸 화해의 제스처를 뇌물 요구를 위한 술수로 오해

 

17세기 이후, 중국 사신이 온다고 하면 한 가지 더 큰 부담이 생겼다. 이때는 중국의 왕조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뀐 시기다. 명나라와 조선은 가장 친한 우호동맹국이었다. 반면 청과 조선은 병자호란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듯 전쟁까지 치렀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한때 서로 적국이었기 때문에 양국이 만나면 언제나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기 일쑤였다. 조선은 청나라 사신이 무슨 트집을 잡아서 침공하거나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걱정했고, 청나라는 조선이 무슨 음모를 꾸미지 않나 의심했다. 전쟁이 끝난 지 두 세대가 지났지만 양국의 불신은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1720년 숙종이 승하했을 때의 일이다. 청나라에서 조문사절단을 파견했다. 일종의 국상 외교였다. 조선에 국왕이 승하하면 중국에서 조문사절을 보내는 건 오랜 전통이었다. 명나라 때에는 사신들이 조선에 도착하면 궁에 설치한 빈소에서 제사를 지냈었다. 그런데 이번에 온 청나라 사신은 숙종을 위해 직접 숙종릉에 가서 제사를 지내겠다고 했다. 청나라 입장에서는 이 기회에 그동안의 껄끄러웠던 관계를 개선해보려는 의도였다. 현대사회에서도 어느 한 나라에 큰 불행이 생기면 분쟁을 자제하고 화해의 계기로 삼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조선의 조정은 오히려 발칵 뒤집혔다. 조정 대신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누구는 청나라 사신이 더 많은 뇌물을 요구하기 위한 술수라 추측했고, 누구는 외교적인 결례라고 했다.

 

하지만 이 상황의 근본적인 이유는 조선이 청나라의 풍습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발생한 것이었다. 청나라에서는 다른 사람이 상을 당했을 때 직접 그 사람의 무덤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 게 최고의 예우였다. 그래서 청나라는 조선의 국왕에게 나름 최고의 예우를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풍습을 몰랐던 조선은 여기에 또 다른 음모가 있을 것이라 의심했다. 조선의 관료들은 열심히 고민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힘들게 직접 능에까지 간다고 하는 걸까? 의심에 의심을 했더니 번뜩 떠오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숙종릉의 비석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고 명나라 연호를 쓴 게 생각났다. 그것은 조선에서 창안한 명나라의 연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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