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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정조를 통해 본 리더십

정조는 왜 신약 개발에 몰두했을까?

노혜경 | 188호 (2015년 11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척서단(滌暑丹)은 수원 화성을 건축할 때 일꾼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정조가 특별 지시로 연구개발해 만든 일사병 치료제 신약이다. 조선시대 평민들은 하루에 두 끼 먹는 사람도 드물었다. 평소 영양도 부족하고 불균형이 심해 혹서기에 일할 때는 일사병의 위험이 더 컸다. 당연히 약에 대한 수요는 컸지만 문제는 약이 너무 비쌌고 그 약을 구성하는 한약재도 귀했다. 개중에는 수입해야만 구할 수 있는 비싼 약재도 있어서 이런 약을 대량 제조해 일반 인부들에게 공급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정조는 연구개발을 통해 대량 생산의 길을 열며 척서단 개발에 성공했다. 특히 환으로 제조해 공사 현장에서 응급약으로 사용하기 쉽도록 했다. 처음에 10년을 예상했던 수원 화성 공사를 28개월 만에 끝마칠 수 있었던 것은 평민들은 얻기 힘든 귀한 약을 나눠줌으로써 직접적인 복지를 챙겨준 것은 물론 인부들의 사기와 자부심을 높여줬던 것이 큰 역할을 했다.

 

편집자주

영조와 정조가 다스리던 18세기는 조선 중흥의 시대라 불립니다. 하지만 이런 타이틀은 결코 쉽게 얻어진 게 아닙니다. 노론과 소론 간 권력 투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 즉위한 두 왕은 군왕의 소임이란 특정 당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도탄에 빠져 있는 조선과 백성을 위해 있는 자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당시로선 너무나 혁명적인 선언인 탓에 수많은 방해와 반대에 직면했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지혜와 용기, 끈기로 무장해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어 낸 두 임금, 영조와 정조의 기록을 통해 진정한 리더의 자질에 대한 통찰을 얻어 가시기 바랍니다.

 

바야흐로 수능의 계절이 돌아오고 있고, 그보다 더욱 힘들다는 입사시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오랜 시간 동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시험장에 가거나 혹은 면접을 보러 들어가지만 떨리는 마음을 어쩌기 힘들어서청심환을 손에 쥐고 마음을 진정시키곤 한다. 청심환은 원래 중국 송나라 때부터 알려진 처방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부터 복용하는 환자가 많아졌다고 한다. 심장의 열을 풀어주고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는 의미로 청심환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청심환은 흔히 들어봤겠지만 아마도척서단(滌暑丹)’ ‘광제단(廣濟丹)’ ‘제중단(濟衆丹)’ ‘향유산()’ 등의 이름은 쉽게 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이런 이름들로 잘 처방되지 않는 약이기 때문이다. 한의학을 전공하는 이들도 조선시대 한의서를 통해 접할 수 있는 정도다. 먼저 이 약들의 효능을 보면 대부분 일사병 치료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더위를 먹었을 때 구토를 완화시켜주고 몸에 기운을 돋우어 주는 약이었다. 향유산의 약재 구성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외에는 정확한 성분이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약의 재료에 따라 가격과 효능에 조금씩의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제중단은 겨울에 한기를 막는 약으로도 썼는데 현재의 영양제와 비슷한 역할을 해서 혹서기와 혹한기 동시에 쓸 수 있었던 처방이라고 한다.

 

신약 개발에 몰두한 정조

 

향유산을 제외한 척서단, 광제단, 제중단 모두 정조의 명령으로 새로 개발된 약이다. 이 중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이 바로 척서단이다. 척서단은 화성을 건축할 때 일꾼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정조의 특별 지시로 연구개발해서 만든 신약이다. 더위를 먹어 호흡이 가빠지거나 열이 날 경우 증세에 따라서 1정 또는 반 정을 맑은 물에 타서 마시도록 했다. 1794(정조 18) 625일에 척서단 4000정을 만들어 인부들에게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면 정조는 왜 특별히 신약까지 개발해 가며 인부들에게 제공했던 것일까? 조선시대 평민들은 하루에 두 끼 먹는 사람도 드물었다. 평소에 먹는 전체 식사량뿐 아니라 영양도 부족하고 불균형했기 때문에 특히 혹서기에 일할 때는 일사병의 위험이 더 컸다. 그래서 약을 준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약이 너무 비쌌고 그 약을 구성하는 한약재도 귀했다. 향유산의 경우 향유, 후박, 백편두가 기본 성분이고 증세에 따라 인삼에 빈랑, 정향같이 열대지방에서 산출되는 향료까지 들어갔다. 구성 약재 중에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아 수입해야만 구할 수 있는 비싼 약재도 있어서 이런 약을 대량 제조해 일반 인부들에게 공급하기는 쉽지 않았다.

 

따라서 공사장 인부들의 일사병 치료는 거의 방치되거나 그늘에서 쉬게 하는 정도의 조치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면 혹서기에는 공사를 중단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교통이 불편했던 이 시대에는 공사를 중단했다가 새로 시작하는 것이 더 큰 고역이 될 가능성이 많았다. 그리고 수십 리를 걸어 집으로 오고가려면 일사병에 걸릴 위험은 마찬가지였고, 이들 대부분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용직이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도 먹고살 길이 막연한 상황이었다. 정조는 백성들의 이런 고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문제로 고민하다가 어느 날 이런 생각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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