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재위 후반기는 전란을 수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 행정을 정상으로 되돌려야 하는 중차대한 시기였지만 인조는 이 시기를 세자 책봉 문제로 허비한다. 인조는 적장자인 소현세자가 갑자기 사망하자 소현세자의 아들인 원손 대신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위에 앉히고자 한다. 결국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이 왕위를 잇게 되는데 이는 종법상 정당한 계승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후 예송논쟁을 촉발한다. 그런가 하면 인조는 상벌이 엄격하지 못하고 신하의 자질과 상관없이 그저 자신에게 무조건 충성하냐 아니냐에 따라 중용 여부를 결정함으로써 인사를 망치기도 했다.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49일간의 농성이 실패로 끝나고,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11세 번 절하면서 각각 세 번씩, 모두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 바닥에 닿게 하는 것이다.
닫기를 올리며 항복하면서 왕실과 조정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랜 세월 오랑캐라 부르며 무시하던 여진족을 상국으로 받들어야 했으니 당시 지식인들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난 회22DBR 389호 ‘높은 연봉·좋은 근무 환경보다 중요한 것은?’ 참조.
닫기에서 소개했듯 김상헌을 비롯한 많은 신하가 사직하고 조정을 떠난 것은 그래서였다. 도리를 지키지 못한 정권에서 벼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국정이 마비되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전란을 수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 행정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일이 시급했다. 이를 인조와 신하들도 잘 인지하고 있었다. 1639년(인조 17년) 경상도에 시범적으로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 효종 대 대동법 확대의 기틀을 닦았으며, 백성을 쉬게 해야 한다는 ‘여민휴식(與民休息)’33『인조실록』 16년 5월 16일
닫기의 이념 아래 긴축 재정을 운용하고, 왕실에서 사용하는 비용을 줄였으며, 조세와 부역을 감면하는 등의 조처를 했다. 또한 전국적으로 우역(牛疫, 소 전염병)이 퍼져 특히 “평안도에 살아남은 소가 한 마리도 없는” 등 피해가 극심해지자 몽골에까지 가서 소를 구매해 나눠주기도 했다.
하지만 인조는 세자 책봉과 강빈의 옥사로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능력 있는 신하는 보호해 주지 않으면서 간신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조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잘해야 한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스스로 잘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 버린 시기, 이것이 인조의 재위 후반기였다.
김준태 교수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유학대학 연구교수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왕의 공부』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