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은 대중들의 긍정적 인식과 다르게 그렇게 좋은 리더는 아니었다. 광해군은 즉위 후 왕권에 대한 극심한 불안과 강박으로 인해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특히 동생 영창대군을 교동에 위리안치했다 살해하고 몇 년 후 어머니인 인목왕후를 대비에서 폐서인한 ‘폐모살제(廢母殺弟)’는 그가 벌인 대표적 악행이다. 또한 광해군은 인재를 널리 쓰지 않고 특정 붕당(대북파)에 힘을 몰아준 갈라치기 리더십을 통해 조정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 밖에도 그는 불필요한 토목공사를 벌여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공동체의 역량을 한데 모으지 못하고 갈등과 분열로 이익을 얻으려 할 경우 그 리더십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은 임금이 돼 15년 넘게 나라를 다스렸으나 반정(反正)으로 폐위되고, 묘호(廟號)11왕이 승하한 뒤 그 신위를 종묘(宗廟)에 봉안할 때 붙이는 호칭으로, 태조, 세종, 숙종, 영조 등이 바로 묘호다.
닫기도 받지 못한 채 ‘군’으로 강등된 비운의 왕이다. 하지만 같은 처지인 연산군과는 다르게 우호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대동법을 시행해 백성의 부담을 줄여줬으며,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통해 조선의 안전을 확보하는 등 긍정적인 평가가 적지 않다. 광해군을 미화한 영화, 드라마의 영향으로 대중의 인식은 더욱더 우호적이다. 하지만 ‘광해군이 정말 그런 평을 받을 만한 임금이었는가?’라고 묻는다면 아니라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그가 저지른 수많은 실책은 17세기 초반의 조선을 혼돈으로 이끌었다.
흔들리는 전쟁 영웅
광해군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은 세자 시절 그가 보여준 활약에서 출발한다. 임진왜란 발발 직후인 1592년(선조 25년) 4월 29일22적자(嫡子)가 없었던 선조는 즉위한 지 25년이나 됐지만 세자를 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파천(播遷)하면서 부랴부랴 세자를 책봉한 것이다.
닫기,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은 분조(分朝)33조정을 나누었다는 뜻으로 국가적인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왕이 이끄는 조정과 세자가 이끄는 조정을 별도로 조직해 운영함으로써 유사시를 대비하는 것이다. 당시 선조는 자신은 명나라 땅으로 들어가 후일을 대비하겠다며 전쟁을 지휘하고 국정을 처리하는 일을 모두 세자에게 떠넘겼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6월 1일)
닫기를 이끌면서 동분서주했다. 전쟁터를 누비며 적진 깊숙이 들어가는 일도 마다하지 않은 광해군의 담대한 행보는 민심을 수습하고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는 데 크게 공헌했다.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군대의 총지휘관 유정(劉綎)이 “세자 광해군 이혼(李琿)은 청년으로서 자질이 뛰어나게 영리해 온 나라의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존경하며 복종하고 있으니, 국왕께서는 빨리 세자를 재촉해 전라도와 경상도로 내려가 머물면서 명군(明軍) 본진과 협력해 모든 일을 경리(經理)하게 하소서. 이것이 작금의 제일 중요한 일입니다”44『선조실록』 선조 26년 9월 19일
닫기라며 광해군의 삼남(三南) 지방 파견을 요구할 정도였다. 가히 ‘전쟁 영웅’이라 불릴 만했다.
그런데 세자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임금 선조의 질시도 커졌다.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길까 봐 두려웠던 선조는 여러 차례 양위 소동을 일으키며 광해군을 견제했다. 여기에 영창대군이라는 대체제까지 등장한다.55광해군의 후견인이었던 의인왕후가 승하하고 선조의 계비가 된 인목왕후가 낳은 선조의 유일한 적자(嫡子)다. ‘대군’에 봉해진 것은 광해군 3년의 일이지만 편의상 영창대군이라 호칭한다.
닫기 물론 큰 공을 세우고 흠결이 없으며 백성과 신하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던 광해군이 교체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그러나 명나라로부터 세자의 지위를 공식 승인받지 못했던 터라66명나라 황제인 만력제에게는 서자들만 있었는데 장자 주상락을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는 신하들의 의견과는 달리 만력제는 셋째 아들인 주상순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조선에서 둘째 아들인 광해군이 세자가 될 경우, 만력제에게 정당화 논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명나라 조정은 광해군에 대한 인준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닫기 광해군의 불안감은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김준태 교수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유학대학 연구교수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왕의 공부』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