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복식부기, 화포 등 세계적 수준의 기술과 경영 체계를 물려받은 조선이 기술 후진국으로 전락한 이유는 기술을 육성하는 국가 시스템의 부재에서 찾을 수 있다. 사농공상을 기반으로 한 건국 이념은 근본적으로 기술을 경시했으며, 특히 1442년 장영실의 퇴장은 기술 축적의 맥을 끊는 계기가 됐다. 반면 은 제련 기술 등 조선에서 외면당한 신기술은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 일본의 비약적 성장을 이끌었다. 국가뿐 아니라 기업도 기술 개발뿐 아니라 그것을 상용화하고 보호하는 총체적인 시스템을 설계하는 데 각별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고려 시대에는 세계 일류를 자랑하는 과학 기술이 수두룩했다. 먼저 고려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개발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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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독일의 구텐베르크보다 78년 앞섰다. 목판 인쇄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는 당시 책의 제작과 보급이 활발했고 지식의 전파가 체계적으로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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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고려 말 최무선이 우왕의 지시로 화통도감을 설치해 화포를 개발하고 1380년 진포해전에서 수군 전함에 배치해 운용한 것도 창의적인 시도였다. 이는 동양 최초의 함포 운용이었을 뿐 아니라 세계 최초로 함포를 사용해 승리한 해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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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고려 수도 개경의 상공인들은 서양보다 200년 이상 앞서 복식부기(Double Entry Book-keeping)를 사용했다. 송도사개치부법(松都四介治簿法)이라 불리는 개경 상공인들의 복식부기 기록 방식은 서양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만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 현금흐름표를 생산했다는 점에서 서양의 복식부기와 차이가 없었다. 또 수익적 지출과 자본적 지출을 명확히 구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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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지성 괴테가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극찬한 바 있는 복식부기는 서구 자본주의 발전을 이끈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놀랍게도 고려가 유럽보다 앞서서 사용했고 조선 시대에도 계승된 것이다. 조선 초기 상업과 공업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의미 있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고려 시대에 축적된 과학기술은 조선의 세종 시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많이 계승됐다. 일례로 세종대왕 시절 조선군의 화포 체계는 세계적인 수준으로까지 올라갔는데 세계 최초의 로켓탄이라 할 수 있는 신기전이 개발되고, 권총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10㎝ 내외 길이의 세총통이 개인 화기로 개발됐다. 세종 시대 세계 최초로 제작된 측우기는 강우량을 측정하는 기구라는 하드웨어 측면에서도 탁월했지만 강우량을 측정해 비가 오는 패턴을 연구하고 자료를 축적해 농사에 활용하고자 한 것이 소프트웨어의 혁신이라는 측면에서 더 의미가 있다.
흔히 고려청자의 기술적 우수성과 탁월한 예술성을 강조하면서 조선백자는 그 아래 수준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조선백자는 도자기 제조 기술에서 소재 혁신(진흙 → 고령토)을 이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맑고 영롱한 빛을 발하는 조선백자에 일본식 도안과 채색을 한 일본자기는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이처럼 세계 수준의 기술과 경영 체계를 갖추고 출발해 세종대왕 시절에 꽃을 피웠던 조선은 후기에 기술 후진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의 힘은 과학과 기술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해야 산업 생산성이 높아지고 파괴력과 정확도가 큰 무기 개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기와 선동으로 과학과 기술을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국가는 이미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과학 기술의 쇠퇴로 인해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왜 세계 수준이었던 조선 초기 과학기술이 조선왕조 500년을 거치며 하위권으로 전락했을지 분석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