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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비와 日경제의 우울증

김정수 | 36호 (2009년 7월 Issue 1)
1993
년 6월 9일, 일본 열도는 축제 분위기에 들떴다. 많은 국민들은 새벽 6시부터 온종일 TV 앞에 몰려 앉았다. 바로 이날, 일본 왕실 계승자인 나루히토(仁) 왕세자와 마사코(雅子) 왕세자비가 역사적인 결혼식을 올렸다. 나루히토는 당시 34세로, 일본 왕실 역사상 가장 나이가 많은 미혼의 왕세자였다. 그래서 더더욱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도쿄 한복판에 그림처럼 자리잡은 황궁은 한때 그 땅값이 미국 캘리포니아 전체와 맞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궁전에서 살게 된 왕세자 부부는 동화책에서처럼 ‘그 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하고 순탄하게 살지는 못했다. 무엇보다도 마사코에게 주어진 출산의 부담, 특히 왕실을 이을 남자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부담이 너무나 컸다. 마사코는 수년간의 불임과 한 차례의 유산을 거쳐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금기시하는 인공 수정까지 한 끝에 37세가 돼서야 겨우 아이코(愛子) 공주를 낳았다. 그렇지만 이후 왕실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종의 우울증에 시달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Princess Masako>는 호주 시드니 모닝헤럴드의 일본 특파원이었던 벤 힐즈가 쓴 책이다. 힐즈에 따르면, 마사코 왕세자비의 부적응은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생각보다 깊은 뿌리가 있다고 한다. 개방적이고 성취욕이 높은 마사코와, 항상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왕실의 의무를 다할 것을 주문하는 일본 왕실의 보수적인 분위기는 애초부터 공존하기 어려웠다.

외무고시 합격한 왕세자비
마사코의 이력은 매우 특이하고도 화려하다. 그는 훗날 외무성 장관이 된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외국 생활을 했다. 덕분에 영어는 물론 독일어, 러시아어, 프랑스어에도 능통하다. 왕세자비가 된 후, 고르바초프 전 러시아 대통령과 통역 없이 담소를 나눠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버드대에서 세계적인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를 지도 교수로 수학했고, 이후 도쿄대 법대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23세의 나이에 외무고시에 당당히 합격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외교관이 됐다. 그 후 줄곧 요직을 거치다 국비 장학생으로 영국 옥스퍼드대로 유학을 떠났다. 164cm의 키에 외모도 출중하고, 소프트볼 선수로 활동했을 만큼 건강한 재원이었다.
 
반면 나루히토는 어려서부터 왕실의 승계자로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도록’ 교육받았다. 어려서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바이올린의 소리가 항상 ‘앞에 나선다’는 이유로 악기를 비올라로 바꿨을 정도였다. 그 역시 옥스퍼드대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나루히토는 ‘18세기 템스 강의 항해와 교통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의 석사 논문을 썼는데, 당시 쟁점이었던 ‘수로에 대한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300년이 지난 시점이라도 민감한 사안에 대한 사견(私見)을 드러내는 것은 왕세자로서 옳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미치코(美智子) 왕비는 전 일본인의 육아 지침서가 된 <나루짱 켄포(ちゃん憲法·나루히토 헌법)>를 직접 집필했을 정도로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나루히토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보호와 교육 속에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다.
 
두 사람의 성장 배경을 보고 나면, 마사코 왕세자비가 일본 왕실의 폐쇄적인 분위기와 관료주의를 극복하기 어려웠다는 점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유롭게 자랐고, 자신의 사회적 성공을 진취적으로 추구해왔던 현대 여성이었다. 나루히토 왕세자는 결혼 전에 마사코에게 “왕실의 일원으로서 더 많은 외교적 활동을 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왕실은 마사코의 해외 활동을 최소화했다. 불임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게 명분이었다. 마사코는 왕세자비가 된 후, 친구들을 만나는 일에도 극도로 제한을 받았다. 심지어 친정 식구들도 결혼 후 3년간 다섯 번밖에 만나지 못했다. 또한 1년에 1000개 이상의 행사에 참석해야 했는데, 대부분은 식목일 기념식 같은 형식적인 행사였다. 나루히토도 마사코를 돕기 위해 노력하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왕실 전통’의 높은 벽을 넘을 수는 없었다.
 
힘은 있지만 취약하고 나이 든 경제
일본 왕실의 이런 이야기는 현재 일본 경제가 처한 문제점과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왕실을 빼닮은 일본 경제는 마사코 왕세자비 같은 ‘새로운 활력소’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3년부터 2006년까지 영국의 경제지 이코노미스트 편집장을 지냈으며, 일본에서 다년간 근무했던 빌 에모트는 일본 경제를 ‘힘이 있지만 취약하고 나이가 들어가는(powerful, vulnerable, ageing) 경제’로 규정했다.
 
일본 경제는 여전히 ‘힘 있는’ 지위를 지키고 있기는 하다. 2007년 기준으로 일본의 경제 규모(4조4000억 달러)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다. 전 세계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5.4%)과 주식시장 시가 총액(최근 중국에 밀리기는 했지만)도 여전히 세계 4위 규모다.
 
하지만 경제 성장률은 19871990년 4.5%에서 1990년 버블 붕괴 이후 1%대로 추락했다. 1995년 이후에는 장기 침체의 늪에 빠졌다. 도쿄 주식시장은 1990년부터 2003년까지 80%가 급락했고, 부동산 가격 또한 2005년까지 76%나 하락했다. 2009년 -5%로 예상되는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010년에는 3%대로 회복될 전망이다. 하지만 이는 전년도의 마이너스 성장에 따른 착시 현상(low base 효과)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일본 경제가 본격적인 회복기에 진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앞으로 일본 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인구 노령화다. 일본의 출산율은 여성 1인당 1.3명으로 최저 수준인 데 반해, 평균 수명은 세계 최고다. 노령화는 1947년 이후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들이 은퇴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빠르게 진행될 전망이다. 2015년에는 1990년 12%에 불과하던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5%로 급증하게 된다. 이는 곧 과다한 사회 보장 비용과 노동력 부족으로 이어질 것이다. 현재의 연간 2%인 생산성 증가율이 획기적으로 높아지지 않는 한 경제 성장의 하락을 막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의 사회와 경제는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을 제외하고는 혁신적인 변화를 추구하지 않았다. 일본 경제의 주체들은 언제나 ‘작은 변화들’을 통해 점진적으로 변혁을 이루려고 노력해왔지만, 이에 대한 외부의 시선은 만족스럽지 않다. 무역수지 흑자가 큰 일본이지만, 개방의 수준은 예상외로 낮다. 일본의 무역 규모는 GDP 대비 28%에 불과해, 굳이 중국의 67%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매우 낮은 수준이다. 도쿄 주식시장의 외국인 비중은 1990년 4%에서 2007년 28%로 급증하기는 했지만, 우리나라에 비해서도 높은 수준이 아니다. 2006년 한 해 동안의 인수합병(M&A) 규모는 GDP 대비 4%(약 200조 원) 규모로 영국, 독일, 미국 등의 710%에 비하면 매우 낮다. 국제화된 인재 양성이라는 측면에서도 미흡한 점이 많다. 중국에서는 매년 13만 명의 학생들이 외국 대학에 진학한다. 반면 일본의 유학생은 8만 명에 불과하다. 인구 비례로 보면 적지 않은 숫자라고 할 수 있지만, 일본의 교육 및 소득 수준을 생각하면 많지 않다.
 
일본 경제가 앞으로 점진적 변화만을 가지고도 지금과 같은 파워를 유지할지, 아니면 획기적인 혁신을 통해 돌파구를 찾아낼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국가든 조직이든, 새로운 활력소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퇴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1990년대의 일본은 이전 40년 동안의 경제적 성공에 도취해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야 했다. 따라서 일본은 중국과 인도 등에 밀려 경제 대국으로서의 파워를 조금씩 상실하거나, 마사코 왕세자비처럼 ‘우울증’을 겪지 않기 위한 방법을 열심히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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