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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로 본 트렌드: 최초의 장편 탐정소설 『마인(魔人)』

고정관념 깬 차별화, 원조를 누르다

이경림 | 255호 (2018년 8월 Issue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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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 대중이 사랑하는 문화 콘텐츠 1순위를 다투는 것이 공포와 추리다. 어두운 영화관에서 스크린을 보거나 혼자 방에서 책을 읽을 때 목덜미를 스치는 오싹하고 싸늘한 기운을 상기해보라. 안타깝게도 공포 영화 붐이 소강상태인 요즘 여름 영화가를 호령하는 것은 시원한 액션을 앞세운 대형 블록버스터들이다. 하지만 여름 서점가에선 어김없이 추리물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독자들이 가장 많이 읽는 추리소설은 어떤 작품들일까? 2018년 7월 셋째 주 교보문고 소설 베스트셀러 목록을 살펴보면 히가시노 게이고를 필두로 한 일본 추리소설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추리소설 시장은 흔히 영미권과 일본이 양분하고 있다고 하는데 국내에서는 거의 일본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한국 추리소설을 좀처럼 찾기 어려운 것은 아쉽다. SF와 추리소설은 애초에 외국에서 수입된 장르긴 하지만 재능 있는 한국 작가들이 창작에 매진해 온 역사를 갖추고 있다. 다만 베스트셀러 목록에 실릴 정도로 잘 팔리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한국 추리소설이 항상 안 팔렸던 것은 아니다. 이번 글은 한국의 베스트셀러 추리소설 『마인』을 통해 국내 추리소설의 저력을 살펴보고자 한다.

국내 추리소설의 효시, 수입과 모방
1939년에 발표된 최초의 ‘장편탐정소설’ 『마인(魔人)』은 1939년 2월부터 10월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됐고 연재 종료 직후 단행본으로 출판되면서 큰 인기를 누렸던 작품이다. 1939년 12월 처음 단행본으로 나와 해방될 때까지 18판을 찍었고 한국전쟁 직후에는 30판을 넘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사실 『마인』 이전에도 추리소설이라 부를 만한 작품들이 존재했다. 그 역사는 멀리 조선 송사소설(訟事小說)1 의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지만 ‘미궁에 빠진 사건을 논리적으로 해결한다’는 오늘날 추리소설의 개념에 근접하는 작품의 효시는 1911년 신소설 작가 이해조가 발표한 『쌍옥적(雙玉笛)』이다.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시작된 추리소설의 인기는 단번에 세계적으로 확산됐는데 식민지 관계가 그렇듯 이 인기는 제국 일본을 먼저 강타한 후 조선에도 밀려 들어왔다. 『쌍옥적』은 유럽발 추리소설이 조선에 드디어 당도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11년 이후에도 국내 창작 추리소설은 꽤 꾸준하게 발표된 편이다. 비범한 이성을 앞세워 논리적 추리를 선보이는 탐정, 미궁에 빠진 사건, 점차 백일하에 드러나는 악당의 경악할 만한 정체, 그리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예측을 빗나가는 서사 등 추리소설에는 당시 다른 장르에 없었던 기발한 매력들이 가득했다. 게다가 추리소설은 명실상부하게 ‘돈이 되는’ 몇 안 되는 장르 중 하나였다. 그 황금빛 매력에 끌려 김유정이나 박태원처럼 명망 있으나 가난에 시달리던 작가들도 심심찮게 탐정소설 번역에 손을 댔다. 채만식 같은 경우에는 필명을 써가며 창작 추리소설에 도전하기도 했다. 다만 추리소설을 향한 독자의 사랑에 비례할 만큼 ‘잘 팔린’ 창작 추리소설은 『마인』 이전에는 없었다.

1930년대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유럽과 미국, 일본의 추리소설(아서 코난 도일, 모리스 르블랑, S.S. 반다인, 에도가와 란포)이 출판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출판 시장에서 추리소설에 대한 수요는 넘쳐났지만 그 수요는 애초에 수입품이 만들어낸 수요였고, 이런 수요는 수입된 추리소설들이 모조리 흡수했다. 독자들의 기대치가 이 수입 소설들에 맞춰진 상태에서 국내 작품은 여러 면에서 수준 이하로 보였다. 스타일은 투박했고 만듦새는 엉성했으며 필요 없어 보이는 곁가지가 많았다. 외국 추리소설을 둘러싼 문화적, 사회적 맥락을 무시하고 그저 배경만 국내로 바꾸려다 보니 독자들이 위화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았다. 해외 진출한 기업이 현지화에 고생하듯이 국내 작가들도 해외에서 수입한 추리소설의 정수를 유지하면서도 국내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현지화에 성공하기까지 시행착오의 시간이 필요했다.

모든 대중문화 콘텐츠에는 ‘원조’가 있다. 후발주자가 취하는 전략 중 하나가 원조를 모방하는 것이다. 수요를 창출하는 힘, 즉 시장을 확장시키는 힘이야말로 원조의 매력에서 기원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전략의 큰 단점은 뭘 해도 원조와 비교당할 운명에 처한다는 것이다. “원조보다 별로인데”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평생 싸워야 하는 숙명이다. 대개 이 대결에서 후발주자가 완승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제2의 ○○’를 표방하며 야심 차게 시장에 진출했다가 된서리를 맞고 들어간 케이스가 수도 없이 많다. 그 많던 ‘제2의 애플’은 어디로 갔을까? 결국 대중이 기억하는 것은 ‘원조’ 애플뿐이다. 왜 그럴까? 모방만으로는 원조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인』 이전의 창작 추리소설들은 모방의 함정에 빠져 있었다. 완전한 모방은 거의 불가능하다. 항상 원본에서 뭔가 하나 빠진, 어딘가 어설픈, 닮았는데 모자란 복사본이 나오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마인』은 이 난관을 어떻게 돌파했을까? 『마인』은 원조와 ‘다른’ 것을 만드는 전략을 선택했다. 원조의 매력을 철저하게 분석한 끝에 만들어진 ‘다른’ 추리소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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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마인(魔人)』, 여러 명의 명탐정을 등장시키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 이후 싱귤래리티(singularity)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 개념은 ‘양적으로 팽창하다가 질적인 도약을 하는 특정 시점’을 가리키는데, 인공지능의 경우에는 인공지능이 인류의 지능을 초월해 스스로 진화를 시작하는 기술적 기점을 ‘특이점’이라 부른다고 한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마인』이야말로 국내 추리소설 역사의 ‘특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마인』은 원조가 보여준 추리소설의 핵심(기묘한 수수께끼로 가득한 사건들, 치밀하고 냉철한 논리, 잔혹한 범행과 절절한 로맨스라는 양념)을 분석해 소화한 뒤 몇 가지 설정을 추가했다. 핵심의 완성도는 철저하게 높이되 아류(亞流)처럼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핵심을 풀어가는 스타일에 변화를 줌으로써 ‘색다르지만 충실한’ 추리소설을 만들어낸 것이다.

열쇠가 되는 설정이 바로 여러 명의 명탐정이다. 『마인』에는 특이하게도 복수의 명탐정이 등장한다. 조선 최고의 명탐정으로 이름 높은 유불란, 그를 질투하며 명탐정의 자리를 노리는 임세훈 경부, 그리스 조각처럼 잘생긴 오상억 변호사, 행동파 탐정소설가 백남수 등이다. 사건은 조선 최고의 미인 무용가 ‘공작부인’ 주은몽이 나이 많은 백만장자 백영호와 약혼을 기념해 연 조선 최초의 가장무도회장에서 시작된다. 피에로로 분장한 범인은 주은몽과 백영호 일가의 목숨을 위협하며 그들을 공포에 몰아넣는다. 신출귀몰한 범인에게 관련자들이 연속해서 살해되지만 범인의 정체와 수법은 오리무중이다. 자, 이제 ‘원조’ 추리소설에서라면 명탐정이 나서서 수수께끼를 하나씩 밝혀나갈 차례가 왔다. 날카로운 관찰력과 뛰어난 이성을 겸비한 ‘한 명의’ 명탐정이 말이다.

하지만 『마인』의 자타공인 명탐정 유불란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그의 이성은 사랑 앞에서 한없이 둔해진다. 그 때문에 그의 냉철한 추리는 절절한 사랑에 가로막혀 좌초되거나 유예되기를 거듭한다. 이로 인해 생겨난 공백에서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명탐정들이 활약할 기회를 얻는다. 사건 한가운데서 가장 먼저 진상에 한 걸음 다가선 탐정소설가 백남수, 범인의 정체에 관해 대담한 추리를 먼저 완성한 오상억, 뛰어난 수사력을 선보이는 임 경부의 활약은 로맨스, 활극, 액션을 중심으로 하는 흥미진진한 재미를 『마인』에 채워 넣는다. 사랑에 고통받는 와중에 악당뿐 아니라 다른 명탐정들과도 대결해야 할 운명에 처한 유불란이 더욱 이채(異彩)를 띠는 것은 당연하다.

‘너무 많은 명탐정’이란 설정은 언뜻 보면 추리소설의 법칙을 통째로 무시하는 것 같다. 본래 명탐정은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데서 독특한 아우라를 얻기 때문이다. 셜록 홈스, 오귀스트 뒤팽, 엘러리 퀸, 미스 마플, 메그레 경감, 에르퀼 포와로, 아르센 뤼팽, 브라운 신부, 손다이크 박사, 파일로 밴스…. 이런 역사적인 명탐정들이 언제 떼로 등장하는 경우를 보았는가? 빛나는 지성과 카리스마, 날카로운 관찰력, 대범한 상상력 같은 자질들이 모두 합쳐진 한 사람이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추리소설의 명탐정이다.

하지만 『마인』은 이 법칙을 과감하게 무시하고 여러 명의 명탐정을 한꺼번에 등장시킴으로써 원조에는 없던 재미들을 새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혈관에 피가 흐르는’ 명탐정 유불란의 인간미, 대범하고 기상천외한 액션과 충격적 로맨스 같은 비추리소설적 요소들을 버무린 서사, 그리고 명탐정 각각이 계주하듯 이어받으며 완성해가는 논리 정연한 추리. “정수(精髓)는 유지하되 원조와 차별화하라!” 『마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차별화가 원조를 이긴다
모든 원조는 언제나 어떤 원조로부터의 차별화에서 탄생한다. 하지만 국내 시장 생태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차별화에 대한 고민이 아직 많이 부족한 것 같다. 예컨대 외식업계를 살펴보자. 커피번, 찜닭, 불닭, 핫도그, 일식 돈가스…. 어떤 음식이 한번 유행한다 싶으면 동네마다 우후죽순처럼 솟아나 간판을 내걸고 모두 비슷한 음식을 팔다가 유행이 사그라지면 마치 벚꽃처럼 한 번에 우수수 져버린다. 이처럼 어느 순간 붐을 타고 비슷한 업체들이 난립하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광경에 우리 모두 익숙해져 있다. 원조를 모방해서 자기 지역에 쉽게 깃발 꽂기를 노리는 전략의 한계는 짧은 수명이 단적으로 말해준다. 모방은 쉽고, 쉬운 것은 난립한다.

차별화에 대한 고민은 기약할 수 없는 투자를 요한다. 그래서 고통스럽고 힘든 과정이 될 것이다. 『마인』의 작가 김내성도 초기에는 원조를 충실히 모방하는 노선을 택했다. 하지만 모방만으로는 아류에 그치고 말 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한 그는 원조에 없는 매력을 더하는 ‘질적 도약’의 길을 모색하는 쪽으로 과감히 나아갔다. 그 결과 우리는 정수를 간직하면서도 색다른 재미를 주는 한국적 추리소설의 원조, 『마인』을 가질 수 있었다.

다행히도 『마인』은 현대어로, 또 초판본 형태로도 정리돼 오늘날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올여름 휴가길에서는 국내 최초 추리소설 베스트셀러 『마인』을 읽으면서 원조와의 차별화를 고민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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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경림[email protected]

    서울대 국문과 박사

    필자는 서울대 국문과에서 현대소설을 공부했다. 신소설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문화와 문학 연구가 만났을 때 의미가 뚜렷해지는 지점에서 한국 소설사를 읽는 새로운 계보를 구성하는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육군사관학교, 국민대, 홍익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국립중앙도서관 주관 한국 근대문학 자료 실태 조사 연구, 국립한국문학관 자료 수집 방안 마련을 위한 기초 연구 등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상아탑 너머에서 연구의 결실을 나누는 방식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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