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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과 규칙성을 갖고 흥분하기’ 장편소설을 쓰는 자유로운 영혼의 조건

한근태 | 213호 (2016년 11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소설은 누구나 쓸 수 있다. 하지만 소설가로 살아남는 일은 지극히 어렵다. 일정 수의 독자를 확보한 사람에게는 소설가로서 뭔가 남다른 핵 같은 것이 있다. 소설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내적인 충동, 장기간 고독한 작업을 버텨내는 강인한 인내력 같은 것이 필요하다. 소설가의 자질이 무엇인가. 첫째, 다른 사람과는 명백히 다른 독자적인 스타일을 갖고 있어야 한다. 둘째, 시간 경과와 함께 그 스타일을 스스로 ‘버전 업’ 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독자적인 스타일이 시간이 흐를수록 일반화되고 사람들의 정신에 흡수될 수 있어야 한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내가 부러워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세계 여러 곳에서 살았다. 다양한 곳에서의 생활을 즐기고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쓴다. 그의 소설을 기다리는 수많은 독자가 있다. 재즈를 좋아하고 조깅을 즐긴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직업을 가졌다. 그야말로 팔자가 가장 좋은 사람처럼 보인다. 오늘은 그런 그가 정말 소설가가 그렇게 끝내주는 직업인지, 어떤 능력이 필요한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쓴 책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소개한다.

소설은 누구나 쓸 수 있다. 문장을 쓸 줄 알고, 볼펜과 노트가 있고, 나름의 작화 능력이 있다면 전문적인 훈련 따위는 받지 않아도 쓸 수 있다. 그는 소설을 쓰기 위한 훈련 같은 건 받아본 적이 없다. 소설은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진입할 수 있는 프로레슬링 같은 것이다. 하지만 링에 오르기는 쉬워도 거기서 오래 버티는 건 쉽지 않다. 소설을 쓰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소설을 지속적으로 쓰는 것, 소설로 먹고사는 것, 소설가로서 살아남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나름의 재능은 물론 기개도 필요하다. 운이나 인연도 중요한 요소다. 일정한 수의 독자를 획득한 사람에게는 소설가로서의 뭔가 남다른 핵 같은 것이 있다. 소설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내적인 충동, 장기간 고독한 작업을 버텨내는 강인한 인내력 같은 것이 필요하다.



자유로운 영혼의 힘

소설가는 좀 특별한 사람만이 되는 것 아닌가 생각을 하는데 그를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의 성장과정은 지극히 평범하다. 한신칸의 조용한 교외주택지에서 컸다. 부모님은 둘 다 교사이다. 공부는 중위권 정도였고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외동이라 별로 혼이 난 적도 없다. 중고등학교를 통틀어 그만큼 많은 책을 읽은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조금 다른 부분이 있었다면 사람들과 섞이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사회생활도 남들과 다른 모습으로 시작했다. 우선 결혼부터 하고 나서 필요에 의해 일을 시작했고 그러느라 7년 만에 학교를 졸업했다.

취직하기가 싫어 가게를 열었다. 재즈 레코드를 틀어놓고 커피며, 술이며, 요리를 차려내는 가게였다. 자본금이 없어 아내와 둘이서 삼 년 동안 일을 겹치기로 하면서 열심히 돈을 모은 끝에 연 가게였다. 집에서 쓰던 업라이트 피아노를 가져와 주말에는 라이브 공연도 했다. 돈을 갚느라 몇 년간 아주 검소하게 스파르타 사람처럼 살았다. 집에는 텔레비전도 없고, 라디오도 없고, 자명종조차 없었다. 난방기구도 없어 추운 날에는 고양이 몇 마리를 끌어안고 잤다. 몇 년간 가게를 유지하고 빚을 갚는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육체노동을 하고 빚을 갚는 일로 이십 대의 낮과 밤을 지새웠다.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청춘을 즐길 여유 같은 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에도 틈만 나면 책을 읽었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일이 그에겐 가장 큰 기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야구장에 갔다 안타 치는 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계시 같은 것이다. 영어에 ‘에피퍼니(ephiphany)’란 말이 있다. 어느 날 돌연 뭔가가 눈앞에 쓱 나타나고 그것에 의해 모든 일의 양상이 확 바뀐다는 말이다. 그렇게 그는 소설가가 됐다.

그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그는 소설가 이전에 자유인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생각하는 자유인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을 때,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다. 쓰고 싶은 소설을 자기 스케줄에 따라 원하는 대로 쓰고 싶었다.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그 개략은 처음부터 확실했다. ‘아직은 잘 쓰지 못하지만 나중에 실력이 붙으면 이러저러한 소설을 쓰고 싶다’는 모습이 머릿속에 있었다. 그 이미지가 항상 북극성처럼 빛나고 있었다. 만일 그런 지향점이 없었다면 상당히 헤맸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을 하고 있을 때 즐거운가라는 것이 기준점이다. 뭔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데 거기서 즐거움이나 기쁨을 찾을 수 없다면, 가슴이 설레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그럴 때는 처음으로 돌아가 즐거움을 방해하는 요소를 깨끗이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남들과 다른 문체

그의 글쓰기는 남들과 달랐다. 일본어로 쓰는 대신 영어로 먼저 쓴 뒤 이를 다시 일본어로 번역하는 식으로 쓴다. 그가 발견한 하루키식 문체다. 단문, 심플한 단어, 군더더기를 덜어낸 표현, 리듬감 있는 스타일은 이렇게 태어났다. 그는 작가 지망생들에게는 “언어와 문체를 새로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조언한다. 소설을 쓸 때 문장을 쓴다기보다는 오히려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에 가까운 감각이 있다. 그는 그 감각을 지금도 소중하게 유지하고 있다. 리듬을 확보하고, 멋진 화음을 찾아내고, 즉흥연주의 힘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쓴 글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인데 그것으로 신인상을 받는다. 아마 거기서 그 상을 받지 못했다면 소설 같은 건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소설은 과거에 없던 그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오리지널리티가 중요하다. 그런데 오리지널리티가 무엇일까? 과거에 오리지널이었던 것을 콕 집어내 현재 시점에서 분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동시대에 존재하는 오리지널 한 표현형태에 감응하고 그것을 현재진행형으로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본능적으로 미워하고 타도할 대상으로 생각한다. 초기의 비틀즈도 그랬다. 어른들은 그들의 헤어스타일이나 패션을 혐오했다. 그들의 레코드를 없애거나 태우는 시위운동도 각지에서 펼쳐졌다. 오리지널리티는 그것이 실제로 살아 움직일 당시에는 좀처럼 알아보기 힘든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오리지널을 위한 조건은 이렇다.

첫째, 다른 사람과는 명백히 다른 독자적인 스타일을 갖고 있어야 한다. 잠깐만 봐도 그 사람의 표현이란 것을 순식간에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그 스타일을 스스로 ‘버전 업’ 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시간 경과와 함께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독자적인 스타일이 시간경과와 함께 일반화하고 사람들의 정신에 흡수돼 가치판단 기준의 일부가 돼야 한다. 핵심은 ‘어느 정도의 시간경과’이다. 시간의 검증을 받지 않고는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

그는 ‘라이터스 블록(Writer's block)’, 즉 소설이 써지지 않는 슬럼프 기간을 한번도 경험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쓰고 싶지 않을 때는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쓰고 싶지 않을 때는 대개 번역을 한다. 번역은 기술적인 작업이라 표현 의욕과는 관계없이 거의 일상적으로 할 수 있고, 동시에 글쓰기에 아주 좋은 공부가 된다.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에세이를 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이제 슬슬 써도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눈 녹은 물이 댐에 고이듯 표현해야 할 재료들이 안에 축적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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