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d Management
두 가지 옵션이 있다. 첫 번째는 10%의 확률로 100만 원을 얻을 수 있고, 두 번째는 누구나 선택하면 10만 원이 주어지는 옵션이다. 어느 것을 택하겠는가? 두 옵션의 기댓값은 10만 원으로 같다. 전통적 재무지식으로 판단하면 기댓값이 같으므로 분산이 적은 두 번째 옵션을 택하는 것이 답이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개인마다 위험에 대한 선호가 다르기 때문에 제각각 다른 선택이 나올 것이다. 각각의 옵션을 선택한 사람이 10명씩 총 20명이 있다고 하자. 최종 결과는 100만 원을 얻은 1명과 10만 원을 얻은 10명, 아무 것도 얻지 못한 9명이 생긴다. 자, 지금부터가 문제다. 사람들은 100만 원을 얻은 1명에게만 주목하고 찬사를 보낸다. 나머지 19명은 무시한다. 사람들은 점점 더 첫 번째 옵션을 택하게 된다. 10만 원을 얻거나 아무 것도 얻지 못하거나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크게 성공한 소수와 아무 것도 얻지 못한 다수가 생기는 쪽으로 흘러간다. Abba의 노래제목처럼 ‘The winner takes it all’이 되는 것이다. 이 경우, 성공한 소수의 winner는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맞을까? 세상사람들이 주목과 찬사를 보냄으로써 그들이 자부심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맞는 일일까?
자부심이란
자부심(自負心, 영어로는 Pride)은 인간의 감정 가운데 설명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다. 공포, 노여움, 기쁨이나 반가움 등 대상에 의해 직접 유발되는 일차적 감정과 달리 원래의 이유인 사건이나 대상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느끼느냐, 즉 자의식과 관련된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부류의 감정에는 수치심이나 죄책감, 연대감 등이 있다. 자부심의 내용은 배후의 사건이나 대상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될 수 있다. 순수하게 개인적으로 느끼는 자부심이 있는가 하면, 속한 조직이나 사회에 대한 자부심이 있으며, 노력과 성취에 대한 자부심이 있고, 타고난 능력이나 지위에 대한 자부심도 있다. 전자와 후자의 구분은 어느 정도 겹치기도 하지만 일치하거나 높은 상관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다. 자부심의 원천이 이처럼 다양할 뿐 아니라 자부심에 대한 평가 또한 사람마다, 문화권마다 상당히 다르다. 현대의 서양사회에서 자부심은 대체로 긍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자기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갖는다는 것은 스스로와 남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출발점이다. 자부심이 높은 사람은 조직과 사회에 대해 충성심이 강하고, 유익한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으며,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더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자주 “난 네가 자랑스러워(I’m proud of you)”라고 얘기하고 조직의 상급자나 연장자들은 하급자나 후배들에게 “자부심을 가지라”고 주문한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지나친 자부심을 경계한다. 겸손과 반대 개념으로 갈등을 일으키고 질시의 표적이 되며 조화롭고 상생하는 사회생활을 저해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특히 기독교 같은 종교에서는 자부심을 허영과 교만, 신 앞에 자신을 낮추지 않고 대적하는 태도와 동일시한다. 단테의 신곡에서 일곱 가지 죽음에 이르는 죄악 가운데 가장 나쁜 죄악으로 묘사한 것처럼 ‘멸망의 지름길’로 여긴다.
진정한 자부심과 휴브리스적 자부심
왜 사람들은 자부심에 대해 이처럼 복잡하고도 다른 생각을 갖게 됐을까? 실제로는 한 가지 감정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감정인데도 자부심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어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수치심(Shame)과 죄책감(Guilty)은 현실에서 서로 연결되는 경우도 있지만 개념적으로는 명확히 구별된다. 수치심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인데 반해 죄책감은 자신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것이다. 죄책감은 반성과 함께 행동을 수정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지만 수치심은 자기혐오와 우울증으로 이어지거나 약물남용, 반사회적 활동 등을 낳기도 한다. 자부심에 대해서도 이처럼 나눠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바로 그점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한 두 명의 학자가 있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의 제시카 트래시(Jessica L. Tracy) 교수와 미국 U.C. Davis의 리처드 로빈스(Richard W. Robins) 교수다. 2007년 그들의 연구결과를 종합한 ‘자부심의 특성(The Nature of Pride)’이라는 논문이 발표됐다. 그들은 자부심이라는 감정이 지구상 어디에서나 어떤 사람들에게나 보편적인 것인지 조사했다. 1차적 감정은 모든 인류에게 똑같은 표정과 몸짓으로 표현되고 인식되지만 자의식과 관련된 2차적 감정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지금까지 학자들의 견해였다. 그런데 서구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은 아프리카의 오지를 포함한 모든 조사지역에서 자부심의 표현이 동일하게 인식됐다. 엄지손가락을 위로 세워 치켜드는 동작은 문화권에 따라서 다르게 인식되는 데 반해 가슴을 펴고 고개를 약간 치켜들며 두 손을 허리에 대거나 치켜든 자세로 약간의 미소를 머금는 것은 어느 문화권에서나 자부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는 자부심이 확실히 인류의 보편적 감정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들의 또 다른 조사는 사람들이 자부심이라는 단어와 개념에서 연상하는 의미를 분류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확연히 다른 두 범주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성취, 승리, 확신과 같이 통제가능하고 개인의 노력에 의해 달성할 수 있으며 자부심의 원천이 되는 것들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거만, 으스댐, 허영 같은 자아도취적이면서도 자기과시적인 태도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들은 앞의 것들과 관련된 자부심을 ‘진정한 자부심(authentic pride)’으로, 뒤의 것들과 관련된 자부심을 ‘휴브리스적 자부심(hubristic pride)’으로 이름 붙이고 구분해서 생각하기로 했다. 자부심은 대체로 성공이나 긍정적 사건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 돌릴 때 생기는데 진정한 자부심은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합격했어”라는 식으로 불확실한 가운데 자기 자신의 노력에 비중을 두는 반면 휴브리스적 자부심은 “나는 항상 뛰어나기 때문에 합격하는 것은 당연해”라는 식으로 안정된 상황과 노력 여부와 관계없는 타고난 자질이나 신분, 자격 등에 비중을 둔다는 것이다. ‘휴브리스’라는 말은 원래는 신의 영역에까지 다다르려는 오만함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는데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토인비(Arnold J. Toynbee)가 ‘성공체험의 우상화’를 뜻하는 역사해석학 용어로 사용하면서 유명해진 말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이카루스는 새의 깃털과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다가 아버지 다이달루스의 경고를 무시하고 태양에 너무 가까이 가는 바람에 밀랍이 녹아 땅에 떨어져 죽었다. 토인비의 해석에 따르면 이카루스가 하늘을 난 것처럼 창조적 소수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 역사가 바뀌지만 일단 역사를 바꾸는 데 성공한 그들 소수는 과거에 일을 성사시킨 자신들의 능력이나 방법을 지나치게 믿어서 우상화의 오류를 범하기 쉽다. 그들은 과거의 경험이나 능력만을 절대적 진리로 믿고 주변 사람들의 생각이야 어떻든, 또 세상이 어떻게 바뀌든 상관없이 과거에 했던 방식대로 일을 밀어붙이다가 결국은 실패하게 된다는 것이다. 과거의 성공에 기반한 부질없는 오만이 바로 휴브리스다.
진정한 자부심이든, 휴브리스적 자부심이든 인류진화의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했기에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표현됐을까?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개인을 위해서나, 소속된 집단을 위해서나 어떤 긍정적인 기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사회에 이롭고 성공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생존과 번식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이 자부심을 느끼면 그 배후의 사건을 좀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더 최근의 일로 느끼게 된다고 한다. 또 자부심을 갖도록 유도된 통제집단은 자부심을 느끼는 동안, 또는 그 직후 부여받은 과제를 수행하는 데 훨씬 좋은 성적을 올렸다. 자부심이 긍정적인 행위를 강화하는 피드백으로 작용한 것이다. 또 집단의 유지와 번성에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집단은 더 높은 지위와 많은 자원을 줌으로써 그런 행동을 장려하므로 자부심을 표현한다는 것은 자기가 그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의 역할을 한다. “나는 전체를 위해 기여하는 좋은 사람이므로 나를 우위에 놓고 대접해달라”고 외치는 것이다. 자부심을 표현할 때는 대체로 크게 웃는 대신 약간의 미소가 따른다. 미소는 우정과 동맹을 뜻한다. 결국 자부심의 신체적 표현은 ‘내가 우위에 있지만 여전히 나는 너의 적이 아니라 친구’라는 신호이다.
휴브리스적 자부심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진정한 자부심은 자부심을 느낄 만한 행동이나 성취에 기반하고 있는 반면 휴브리스적 자부심은 실제로 긍정적인 역할이나 기여에 관계없이 지위나 자원, 존경만을 얻기 위한 지름길 또는 일종의 속임수라는 것이 트래시 교수와 로빈스 교수의 해석이다. 다시 말하면 ‘존경받을 만함’이 아니라 결과로서의 ‘존경’만을 추구하는 것이며 ‘뛰어난 업적(Excellence)’보다 ‘우월적 지위(Superiority)’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자부심이 만연하면 사람들은 기여하는 바 없이 보상만을 추구하므로 사회적으로 득이 되지 않고 해를 끼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에 기반하지 않고 남들에 의해 주어지는 것의 취약한 바탕 위에서 결과를 추구하므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자기비하로 연결되거나 편견과 집단갈등, 공격성 등의 탈출구를 찾게 된다. 자부심이 행동적으로 표현되는 양식은 동일하지만 배후에는 이처럼 두 가지의 다른 원천을 가지고 있다. 두 교수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논문을 끝내고 있다. “인간적이라는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자부심을 경험하려고 하고 또 자부심을 남에게 내보이려 하는 것이다.”
기여자로서의 자부심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100만 원을 얻은 winner가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맞을까”라는 질문의 답을 생각해보자. 기업가적 위험감수를 통해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사회를 위해 기여한 바가 뚜렷한 성공한 소수에 대해서는 존경을 보내야 하고 그들은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랜덤한 확률로 제로섬 게임에서 승리한 소수라면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옳지 않다. 그들이 느끼는 자부심은 휴브리스적 자부심이다. 건강한 조직과 사회는 결과적으로 승리한 소수들 중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전체를 위해 기여한 바가 확실한 소수를 구별해내고 그들에게 진정한 존경을 보낼 줄 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결과만 중시하고 과정을 무시해 과도하게 위험을 추구하는 건강하지 못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요즘 기업에서는 구성원들의 자부심을 고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데 많은 경우 기업에 소속함으로 인해 얻는 혜택을 통해 자부심을 고취하려고 한다. 그것은 수혜자로서의 자부심, 즉 휴브리스적 자부심이다. 이는 기업 입장에서 자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채무가 된다. 높은 급여와 훌륭한 복지혜택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차별적이고 배타적인 문화를 자부심의 근원으로 삼았던 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았다. 그들이 누렸던 혜택은 대부분 그들의 선배들이 이뤄낸 성취와 업적 덕분이었는데도 언제까지나 자기들이 누려야 할 당연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기업 입장에서 자산이 될 수 있는 구성원들의 자부심은 기여자로서의 자부심, 즉 기업은 사회를 위해 기여하고 구성원들은 기업을 위해 기여한다는 자부심이다. 적절한 위험의 감수와 최선의 노력을 통해 기업과 사회를 위해 좋은 것을 만들어내겠다는 각오와 실천이 자부심의 원천이 돼야 한다. 자부심(自負心)을 한자로 직역하면 ‘스스로 짊어지는 마음’이다. 스스로 짊어지지 않으면 자부심은 어울리지 않는다.
정현천 SK에너지 상무 [email protected]
필자는 서울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1986년 SK그룹에 입사해 회계, 국제금융, 투자가 관리, 구조조정, 해외사업, 전략수립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현재는 SK에너지 상무로 근무 중이다. 경영학, 경제학, 심리학, 생물학, 인류학, 역사 등 여러 분야의 책을 가리지 않고 읽는 다독가(多讀家)이며 변화 추진을 위한 강사로도 활약하고 있다. 포용을 주제로 한 <나는 왜 사라지고 있을까>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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