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반이다’는 말이 있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참 이해가 되지 않았던 말이다. 이제 막 시작한 일이 절반까지 이르려면 아직 멀었는데 왜 시작이 반이라고 할까? 일단 시작만 해도 절반에 이른 것이라면 시작을 두 번 하면 끝까지 이르게 될까? 언제부턴가 세상에는 이뤄지는 일이 절반이 있고 이뤄지지 않는 일이 절반이 있는데 이뤄지는 모든 일에는 반드시 시작이 있으니까 이루고자 하면 망설이지 말고 시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넘어가게 됐다. 중국 명나라 시대의 홍자성이 쓴 채근담에도 “쉬워 보이는 일도 해보면 어렵고 못할 것 같은 일도 일단 시작하면 이뤄진다”는 말이 있다. 무엇인가를 망설이지 말고 일단 시작하기를 부추기고 권고하는 말은 동서고금 어디에나 있는 것 같다. 최근에 복잡성이론에 관해 쓴 어떤 책에서 ‘돌국(Stone Soup) 이야기’를 읽었는데 ‘시작이 반이다’는 말은 조상들의 깊은 지혜가 담겼을 뿐 아니라 현대의 최첨단 물리학에 비춰서도 충분한 근거가 있고 곱씹어서 생각할 부분이 많은 이야기임을 알게 됐다.
돌국 이야기
돌국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다. 중세시대쯤 되는 옛날 동유럽에 심한 기근이 들었다. 인심이 몹시 흉흉해져서 사람들은 친한 이웃에게조차 먹을 것을 숨기고 없는 체하며 나눠주지 않을 정도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별로 굶주려 보이지도 않고 인상도 좋은 나그네 한 사람이 마을을 통과했다. 마을 사람들은 역시나 이 사람을 경계하면서 먹을 것을 주기는커녕 쉬어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쉴 곳을 찾던 나그네는 포기한 듯한 태도로 마을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중얼거렸다. “오늘 자리를 잘 잡아서 돌국을 맛있게 끓여야 할 텐데….” 그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말을 퍼뜨렸다. 돌로 국을 끓인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마을 전체로 퍼졌고 마을 광장 한편에 자리잡은 나그네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사내는 가방 속에서 솥 단지와 아주 잘 포장된 상자 하나를 꺼냈다. 일단 솥을 걸고 물을 끓이더니 상자에서 매끈하게 생긴 돌멩이 하나를 꺼내 과장된 몸짓을 하며 끓는 물에 집어넣었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자, 여러분께 맛있는 돌국을 대접하겠습니다” 하고 소리치며 요란한 의식과 함께 물을 국자로 휘휘 저었다. 그러면서 그는 남들이 알아들을 만한 목소리로 “아, 여기 양배추를 좀 넣으면 정말 맛있을 텐데”하고 중얼거렸다. 얼이 빠져서 구경을 하던 어떤 사람이 집으로 달려가서 숨겨 놓은 양배추를 들고 왔다. 양배추를 받아서 툭툭 썰어 넣은 사내는 다시 “아! 여기에 쇠고기를 조금만 넣어도 왕의 식사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맛있어질 텐데” 하고 좀 크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푸줏간 주인의 아내가 냉큼 집으로 달려가 그 귀한 고기를 한 토막 베어 왔다. 곧 고기가 솥 안에 넣어지고 비슷한 방법으로 양파, 당근, 후추 등이 연이어 솥 안으로 들어갔다. 국이 완성되자 사내는 돌을 꺼내어 상자에 조심스럽게 다시 집어넣고 그 국을 동네 사람들과 함께 맛있게 나눠먹었다. 동네 사람들은 사내가 떠난 후 기근이 지나고 난 다음에도 한참 동안 그 신기한 돌국 이야기를 신나게 떠들어댔고 돌이 가진 효능에 대해 궁금해 했다.
돌국에 집어넣은 돌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그 돌로 인해 모든 것이 시작됐다. 일단 시작되자 국은 어쨌거나 완성됐다. 과연 ‘시작이 반’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생각해볼 만한 문제가 하나 있다. 나그네가 돌이 아니라 양배추 한 포기, 또는 당근 한 뿌리를 가지고 국을 끓이기 시작했다면 과연 국을 제대로 끓일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나그네는 보통의 재료로 아무나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국이 아니라 돌로 국을 끓이겠다고 했다. 그것이 마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 먹혀 들었고 그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붙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다음 과정이 수월하게 진행된 것이다. 복잡성이론에 비춰보면 국에 들어간 돌은 특이점, 또는 변곡점에 해당한다. 평범한 한 지점이 아닌 바로 그 특이점을 지날 때 무엇인가가 시작된다. 즉, 무엇인가의 시작은 바로 그 특이점에 해당한다.
무엇인가의 시작, 특이점
우리는 늦은 나이에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해 뛰어난 경지에 다다른 사람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갖는다. 찔레꽃으로 유명한 소리꾼 장사익은 막노동을 포함해 온갖 궂은 일을 하다가 마흔다섯의 나이에 데뷔 무대를 가졌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듣는 이의 아픔과 슬픔이 모두 어루만져지고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많은 국민들의 안타까움 속에 얼마 전 타계한 소설가 박완서는 습작기간을 전혀 거치지 않고 나이 마흔에 장편소설 <나목>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다. 첫 작품을 발표하기 전까지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그는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고 한국 문학의 성숙을 이뤄낸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소리를 하거나 소설을 쓰기 전 그들의 생애는 언뜻 평범해 보인다. 그들이 새로운 시작을 한 그 순간이 그들에게 아주 우연히 찾아온 것일까? 그야말로 잠을 자고 일어나서 문득 이유를 알 수 없는 충동에 의해 결심하게 된 것일까? 그전에 아무 노력이나 축적 없이 가슴 속에 쌓아둔 이야기나 흥얼거림도 없이 그렇게 된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의 얘기에서 감동을 받거나 그들을 존경할 만한 이유가 별로 없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의 데뷔는 그 전에 응축된 그 무엇인가가 형태를 바꿔 세상에 보여진 특이점이었다.
미국의 ‘모지스 할머니(Grandma Moses, 1860∼1961)’는 놀랍게도 76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101세에 세상을 뜰 때까지 25년 동안 그린 그림으로 미국민들로부터 ‘국민 화가’라는 호칭을 얻었다. 그의 그림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시골을 떠돌던 그림수집상에 의해 할머니의 나이가 80세가 다 됐을 때였다. 1949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그녀에게 ‘여성 프레스클럽상’을 선사했고 1960년 넬슨 록펠러 뉴욕주지사는 그녀의 100번째 생일을 ‘모지스 할머니의 날’로 선포했다. 모지스 할머니는 시골 풍경을 주로 그렸는데 단순하면서도 밝고 따듯한 느낌이었다. 누구든지 그의 그림을 보면 얼굴에 미소를 머금게 된다고 한다. 할머니의 밝은 심성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할머니는 존 덴버의 노래로 유명한 세난도 계곡에서 작은 농장을 꾸려가며 살아가는 시골 주부였다. 10명의 자녀를 출산했는데 그중 5명을 잃은 후 슬픔을 견디기 위해 자수(刺繡)에 푹 빠졌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 관절염 때문에 자수바늘을 들지 못할 지경이 되자 바늘 대신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은 할머니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나이에 주목하지만 그전에 할머니의 가슴속 깊은 슬픔과 자수를 통한 세상과의 화해와 어려움 속에서도 밝게 살고자 애썼던 시골생활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림 그리기의 시작은 그런 것들이 축적되고 응결돼 꽃피우는 특이점이었던 것이다.
시작에 대한 간절함
특이점을 지나기 위해서는 에너지든 사람의 노력이든 많은 축적이 필요하다. 축적된 것이 새로운 형태로 변해서 발현되는 지점이 특이점이다. 물에 열을 가하면 온도가 올라가지만 어느 순간 더 이상 온도가 올라가지 않고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지점이 있다. 그러다 갑자기 끓어서 수증기로 날아가기 시작한다. 일단 수증기로 변한 물의 온도를 더 높이는 데는 그다지 많은 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액체 상태의 물이 수증기로 변하는 지점이 바로 물의 특이점이다. 열을 가하는 것 외에 물을 끓이는 다른 방법으로는 압력을 떨어뜨리면 된다. 다시 말하면 물이 처해 있는 환경이 크게 변하면 물은 새로운 시작을 얻게 된다. 이처럼 모든 새로운 시작에는 많은 에너지 또는 환경의 현저한 변화가 필요하다. 새로운 시작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시작이 반이다’ 또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며 시작과 시도를 부추기고 다그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개인 차원에서 무엇인가 시작한다는 것이 단순한 결심의 문제만은 아니다. 무엇을 시작할 것인가? 그 시작을 진심으로 원하는가? 심지어는 그것을 위해 이미 가진 것을 버리고 희생할 준비까지 돼 있는가? 다시 말하면 새로운 시작을 이뤄낼 에너지를 자기 안에 충분히 비축하고 있는가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그런 에너지가 충분히 비축돼 있다면 의식적인 성찰 이전에 무의식적으로 이미 시작은 이뤄졌을 수도 있다. 시작할까, 말까 망설임이 있다면 그 망설임이 어떤 종류인지 살펴봐야 한다. 새로운 시작이 과연 성공할까, 혹시나 실패하지나 않을까에 대한 두려움이 망설임의 뒤에 있다면 그때는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제격이다. 일단 시작하면 지금 알 수 없는 제3의 힘이 나를 도울 수도 있고 어려움을 헤쳐나갈 힘은 과정 속에서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데 새로운 시작에 대한 간절함이 있는지에 따른 망설임이라면 이는 잘 생각해야 한다. 간절함이 없으면 새로운 시작은 시작이 아니라 시작하는 체하는 것이다. 시작하는 체하는 것으로는 새로운 것의 지속성을 이뤄낼 수 없다.
조직이나 사회 차원에서는 모든 새로운 시작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지워서는 안 된다. 아직 끓지 않고 있는 물에 왜 빨리 수증기가 되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개인들이 새로운 시도를 하기 위한 에너지를 쉽게 축적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고 새로운 시도를 둘러싼 여러 환경적인 압력을 낮춰줘야 한다. 개인들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이해하고 제도나 규정뿐 아니라 조직문화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많은 기업들이 구성원들의 창의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구호 차원에 머물거나 새로운 시도를 장려한다며 소위 ‘의미 있는 실패’에 대해 포상을 하는 식이다. 그런데 ‘의미 있는’이라는 말을 들으면 벌써 어떤 압력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의도와 달리 구성원들로서는 시작에 대한 주저함이 커지기 십상이다. 간절함에 의한 진지한 시도보다는 모럴해저드의 성격을 가진 가벼운 시도들만 부추길 가능성이 있다.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은 결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려운 일이다. 고려해야 할 변수와 경우의 수는 많고 전망은 확실하지 않다. 무엇인가를 시작하기 위해 지금의 상태와는 다른 상태를 취해야 하는데 그것은 익숙한 것을 버려야 하는 것일 수도 있고, 기득권을 놓는 일일 수도 있으며, 따뜻한 냄비 안에서 목욕을 즐기다가 차가운 밖으로 뛰어나와야 하는 일일 수도 있다. 단호한 결단과 함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구성원의 창의성을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돕고 함께 발전하겠다는 진정성과 조직 상층부의 자기 희생을 통한 변화의 솔선수범이 반드시 필요하다.
R&D에 의한 혁신기업으로 이름 높았던 P&G가 170년 역사상 처음으로 CEO가 해고당하는 어려움에 빠졌을 때 신임 CEO인 래플리(A. G. Rafley)는 혁신제품의 50%를 외부의 아이디어로부터 소싱한다는 C&D(Connect & Develop) 전략을 수립하고 실천했다. 이 때 그가 내세운 ‘Proudly found elsewhere’라는 구호야말로 현대 기업에서 새로운 ‘돌국이야기’를 만들어낸 변곡점이자 특이점의 상징이었다. ‘시작이 반이다’는 말은 과연 맞다. 그리고 그 말은 시작하기까지의 어려움과 필요한 노력이 절반이라는 뜻이다.
정현천 상무는 서울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1986년 SK그룹에 입사해 회계, 국제금융, 투자가 관리, 구조조정, 해외사업, 전략수립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현재는 SK에너지 상무로 근무 중이다. 경영학, 경제학, 심리학, 생물학, 인류학, 역사 등 여러 분야의 책을 가리지 않고 읽는 다독가(多讀家)이며 변화 추진을 위한 강사로도 활약하고 있다. 최근 포용을 주제로 한 <나는 왜 사라지고 있을까> 라는 저서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