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DBR은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던 아이가 속절없이 떠나갔다. 엄마는 아이를 기억하며 하루하루를 힘들게 보낸다. 해맑게 웃던 아이를 희미한 미소로 떠올리는 순간, 그녀는 그 소중한 보물이 이제 내게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러나 더 나쁜 것은 그녀가 과거에 집착하느라 현실을 살아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녀에게는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다른 가족이 안중에 없다. 꽃피는 풍경이나 감동적인 영화마저 그녀에게는 의미가 없다.
어려웠던 유년시절을 보낸 한 남자는 부와 명성을 쌓을 때까지 모든 열정을 자신의 업무에 쏟아 붓는다. 앞서 아이를 떠나보낸 여성이 과거에 빠져 있다면, 이 남자는 미래에 매몰돼 있는 셈이다. 물론 결과는 마찬가지다. 그는 가족과 살뜰한 시간도 보내지 못하고, 친구들과 여행을 가려고 하지도 않는다. 현실에서 누려야 할 행복을 무한히 연기하고 있다.
과거나 미래는 단지 우리 머릿속에서만 존재한다. 우리에게 기억하는 능력이 없다면 과거란 존재할 수 없고, 기대하는 능력이 없다면 미래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이뤄지는 삶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앞의 여자와 남자는 ‘지금 그리고 여기’의 삶이 아니라 과거나 미래의 삶에 집착하고 있다. 그들은 삶을 제대로 영위하고 있다기보다는 단지 자신의 관념 속에 사로잡혀 있다. 죽은 아이 때문에, 그리고 미래의 부와 명성 때문에, 현재를 살지 못하는 두 사람에게 과연 행복이 가능할까? 죽은 아이가 되살아나거나 기대했던 부와 명성이 얻어지지 않는다면, 두 사람이 행복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그래서 가장 활달했던 스님 임제(臨濟, ?-867)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미 일어난 생각은 이어지지 않도록 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생각은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 그대들이 10년 동안 행각(行脚)하는 것보다 좋을 것이다. 나의 생각에는, 불법에는 복잡한 것이 없다. 단지 평상시에 옷 입고 밥 먹으며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임제어록>
‘이미 일어난 생각’이 기억된 과거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생각’은 기대되거나 염려되는 미래를 의미한다. 임제는 과거에 대한 집착이나 미래에 대한 염려를 모두 제거해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과거에 대한 집착이나 미래에의 염려는 ‘지금 그리고 여기’ 펼쳐지는 현재의 삶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당연히 현재에서의 행복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이지 않은가! 현재를 영위하라! 과거나 미래로부터 자유로워라! 그러면 너희들은 깨달을 것이다! 임제의 가르침은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라는 영화를 연상시킨다. 이 영화에서 키팅(John Keating) 선생님도 학생들에게 역설하고 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잡아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표현이다. 임제는 이런 정신을 “단지 평상시에 옷 입고 밥 먹으며 일 없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말로 표현했다.
키팅 선생이나 임제 스님의 이야기가 아직도 막연하다면, 불교의 깨달음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를 예로 들어보겠다. 어느 스님이 제자를 불러 몽둥이를 휘두르며 물었다. “이 몽둥이가 있다고 해도 맞을 것이고, 없다고 해도 맞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맞을 것이다. 이 몽둥이는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말해보라.” 스님은 제자가 깨달았는지, 다시 말해 제자가 현재에 눈을 뜨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제자는 어떻게 대답해야 몽둥이 세례를 피할 수 있을까?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으로 유명한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떠올리면서 제자는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제자는 네 대나 맞게 될 것이다. ‘있다’라는 말을 두 번, ‘없다’라는 말을 두 번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생각에 잠겨있을 수도 없다. 그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스승의 몽둥이 세례로 이어질 테니까 말이다.
어떻게 대답하면 스승으로부터 몽둥이 세례를 피할 수 있을까? 만약 스승이 들고 있는 몽둥이에 집착한다면 몽둥이 세례는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제자가 스승이 흔들고 있는 몽둥이에 집착하지 않고 현재로 마음을 연다면, 몽둥이 세례를 받지 않을 것이다. 제자가 대답할 수 있는 답도 무한대에 가깝다. 가령 이런 대답들이다. “스승님, 차 향기가 좋네요.” “법당에 파리가 날리네요.” “바람이 시원하네요.” “목이 말라요.” 등등. 바로 이것이다. 몽둥이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 펼쳐져 있는 차 향기, 파리, 바람, 목마름 등을 향유할 여유가 없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현재의 삶을 영위하는 자유인이 될 수 있을까? 이제 뒤통수를 치는 것처럼 강렬한 임제의 사자후(獅子吼)를 직접 들어보자.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임제어록>
승려로서 임제는 부처, 조사, 그리고 나한과 같이 깨달은 사람들을 만나면 모조리 죽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제자들에게 서슴없이 피력한다. 부처, 조사, 나한이 되려는 제자들에게는 경천동지할 이야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임제의 사자후는 부처, 조사, 나한, 부모, 친척을 실제로 죽이라는 것은 아니다. 미래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 즉 자신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지나친 소망 때문에 현재의 삶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출가한 제자들에게 부모와 친척은 마음속 깊이 담고 있는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부모와 친척으로 상징되는 과거에 대한 집착은 현재를 역동적으로 살 수 있는 자유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임제는 생각한 것이다.
‘지금 그리고 여기서’ 자유롭게 된다면, 임제의 표현을 빌리자면 ‘해탈한다면’, 우리는 부처, 조사, 나한, 부모, 친척을 만날 때 그 현재적 만남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참된 자유는, 혹은 참된 해탈은 우리가 타자를 기억이나 기대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으로 응대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연세대 철학과에서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출판기획사 문사철의 기획위원,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철학 VS 철학>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 <상처받지 않을 권리>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