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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역사

민첩성 희생하며 덩치만 키우다가…

서광원 | 328호 (2021년 09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사람들은 흔히 아둔한 사람을 가리켜 ‘미련곰탱이’라 부르지만 곰은 본래 나무 위에서 생활했을 정도로 빠르고 영리하다. 그러나 육지 생활에 익숙해진 탓에 균형 감각과 반사신경, 민첩함을 잃어버린 아메리카 대륙의 짧은얼굴곰은 아시아 대륙에서 온 곰과의 경쟁에서 패배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시장 생태계의 조직 역시 몸집이 커져도 신속함과 민첩성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요즘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엔 우연하게 생긴 상황을 성장의 기회로 삼는 우발적 전략을 체득해야 할 것이다.



꽤 오래전 지방에 공장이 있는 회사에 강의를 갔을 때다. 시작하기 5분 전, 입장하라는 말을 듣고 강의장에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랐다. 관심 있는 일반인들도 올 수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반인’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아빠, 엄마와 같이 온 초등학생들이 한눈에도 수십 명쯤 됐다.

나도 모르게 ‘어이쿠’ 소리가 절로 나왔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저 아이들에게 내 얘기가 먹힐까, 자연에서 경영의 교훈을 탐색해 보는 내용인데 알아들을 수나 있을까?’ 짧은 시간 동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발표 자료들이 이미 세팅돼 있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그래서 꾸벅꾸벅 졸지 않도록 최대한 쉽게 얘기해야겠다 싶었다. 가능한 한 아이들이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사자와 호랑이들의 생존전략을 중심으로 얘기를 풀었다. 그 덕분에 끝날 때까지 똘망똘망한 눈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혼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역시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었다. 강의를 마친 후 질의응답 시간이 됐다. 어른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에서 이 시간은 대체로 그냥 지나가는 시간이다. 손을 드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래서 그날도 이제 다 끝났구나 싶었는데 ‘특별한 일반인’이 있다는 걸 잠시 잊었던 것 같다. 중간에 있던 한 아이가 손을 들었다.

“○○초등학교 4학년 △△△인데요. 궁금한 게 있어요.”

“예. 뭐든지 물어보세요.”

“단군신화에 호랑이와 곰이 나오잖아요. 근데 왜 우리는 멋진 호랑이의 후손이 아니라 미련한 곰의 후손인가요?”

질문이 끝나는 순간, “와∼” 하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다들 한번쯤 궁금해 했던 내용이기도 하거니와 호기심 많은 아이다운 질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왁자한 웃음 뒤의 시선이 온통 나에게로 모였다는 것이다. ‘맞아. 왜 그렇지?’ 하는 궁금증 가득한 눈들이 내 입만 바라보고 있는데, 세상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얼핏 몇몇 단편적인 내용이 떠오르긴 했지만 사실 나도 아는 게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면서 나중에 알게 되면 꼭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아이들의 질문이 얼핏 유치해 보여도 핵심을 찌를 때가 많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던 경험이었다. 하지만 곰의 후예들이 사는 나라인데도 곰에 대한 자료를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저런 자료를 두세 달 뒤지고 나서야 납득할 만한 얘기를 할 수 있게 됐다.

정말이지 왜 우리 민족은 멋진 호랑이가 아니라 미련한 곰의 후손이 됐을까? 우리는 왜 단군신화에 나오듯 분명 곰의 후손인데 곰보다 호랑이를 훨씬 좋아하고 우러를까? 1988년에 열린 서울올림픽 마스코트도 호돌이였고 2021년 열린 도쿄올림픽 한국 선수단 숙소에 ‘범 내려온다’는 현수막을 걸었다가 내렸을 정도로 말이다. (다행히 요즘 ‘곰표’가 인기를 끌고 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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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면 우리는 곰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 곰은 미련하지 않다. 흔히 ‘미련곰탱이’ 1 라는 말처럼 느리고 둔하다고 생각하지만 이건 곰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곰은 절대 미련하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으며, 둔하지도 않다. 아마 동물원에 있다 보니 할 일이 없어 느려진 곰을 보거나 야생의 곰을 보더라도 겨울잠에 들기 위해 있는 대로 살을 찌운 곰을, 그것도 뒷모습을 주로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를 봐서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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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광원[email protected]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필자는 경향신문, 이코노미스트 등에서 경영 전문 기자로 활동했으며 대표 저서로는 대한민국 리더의 고민과 애환을 그려낸 『사장으로 산다는 것』을 비롯해 『사장의 자격』 『시작하라 그들처럼』 『사자도 굶어 죽는다』 『살아 있는 것들은 전략이 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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