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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정조를 통해 본 리더십

탐관오리를 삶아 죽여라? ‘일벌백계’보다 중요한 ‘합리적 상벌’

노혜경 | 210호 (2016년 10월 lssue 1)

Article at a Glance

조선시대에 탐관오리나 뇌물죄를 저지른 죄인들을 끓는 가마솥에 넣어 삶아 죽이는 형벌인 팽형(烹形)은 사실 그 개념만 있었을 뿐 실제로 시행된 적은 없었다. 사실 팽형과 같은 가혹한 형벌에 대한 기대는 자기 최면과 비슷하다. 그런 처절한 형벌을 시행하면 뇌물죄가 줄어들 것이라고 기대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팽형과 같은 이벤트성 처벌이 특별한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처음에 반짝 효과가 있거나 혹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효과가 없고, 있더라도 일시적일 뿐이다. 오히려 더 큰 불합리를 가져오게 된다. 우리 선조들이 말로만 삶아죽이겠다고 협박하고 실제 팽형을 시행하지 않은 이유다. 섣불리일벌백계(一罰百戒)’를 외치기보다는 매사 정확하고 합리적인 상벌체계를 만드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혜정교는 조선시대 서린방 우포도청(현 동아일보사 부근) 앞에 있던 다리다. 지금은 광화문 교보문고 근처에혜정교터라는 작은 표지석으로만 남아 있다. 표지석에는중학천 위에 놓였던 다리로 복청교라고도 하며, 이곳에서 탐관오리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하기도 했음이라고 안내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이른바혜정교의 시체놀이현장이다.

 

탐관오리에 대한 처벌, 팽형(烹形)

조선시대엔 우포도청 앞의 혜정교에 임시로 부뚜막을 설치하고 커다란 가마솥을 걸어 놓곤 했다. 그런데 한 사람이 포박을 당한 채로 끌려오더니 가마솥 안으로 내쳐진다. 그 사람은 탐관오리로 찍혀서 잡혀 들어온 사람이었다. 물이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넣어서 삶아 죽이는 장면이다. 이 벌이 바로팽형(烹形)’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혜정교에 걸린 가마솥은 실제로는 끓이는 척만 할 뿐 안은 비어 있고 심지어 뜨겁지도 않았다. 가마솥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은 죽은 시체처럼 들 것에 실려서 집으로 돌아가고 장례식이 치러진다. 이후로 그 사람은 살아 있긴 하지만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으로 취급받고 공적인 활동도 불가능하다. 진짜로 삶아 죽이지는 않지만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조선에서 시행됐다고 믿고 있는 팽형의 실체, 즉 혜정교의 시체놀이다. 혜정교에서 삶아 죽이는 판을 벌여놓고 마치 시체로 죽어나가는 것 같은 장면을 연출하면서까지 가짜 팽형을 시행함으로써 사회적, 법적인 사망 선고를 내리는 방식이었다.

 

 

뇌물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삶아 죽이는 형벌이 시행된 건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아대부(阿大夫)의 고사에서부터였다. 이때부터 팽형은 탐관오리를 처벌하는 형벌로 인식됐다. 하지만 조선시대엔 탐관오리나 뇌물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팽형에 처할 만큼 나쁜 놈이라든가팽형을 내려야만 마땅한 놈이라고 비난은 했을지언정 실제로 삶아 죽이는 형벌을 내린 적은 없었다. 그저 말로만 탐관오리를 비난하고 협박하는 수준이었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조선 후기가 되자 상황이 좀 달라졌다. 정치 부패의 정도가 심해지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뇌물도 크게 늘어났다. 뇌물의 증가는 바로 탐관오리의 증가로 이어진다. 뇌물로 쓰일 재원과 물자를 백성들로부터 뽑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당파 간 격투전이 심했던 숙종 때에는 서로 당이 다른 사람들끼리 비난하면서 뇌물을 대는 자가 줄을 잇고 있다며 서로서로 고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이제는 말로만 협박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팽형을 시행하자는 상소가 올라오게 됐다. 옛날이야기 속에서만 등장했던 팽형이 점차 현실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팽형과 같은 가혹한 형벌을 시행하자는 사회적 분위기는 결국 영조가 직접 시도하려는 데까지 이르렀다. 1737(영조 13) 813일의 일이다. “당장 돈화문에서 팽형을 시행해야겠다. 빨리 와서(瓦署, 기와를 제조하는 관서)에 명해 큰 가마솥을 만들어 대기토록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사건의 경위는 이랬다. 당시 정언(正言) 민택수(閔宅洙)는 숙종 때 인현왕후가 폐위될 당시 묵인하고 있었던 이현일(李玄逸)을 신원하자고 건의한 김성탁(金聖鐸)을 엄히 다스려 귀양을 보내자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영조는 들어주지 않았고, 민택수는 오히려 자신의 발언에 책임을 지겠다며 물러나겠다고 했다. 이 일을 두고 사간원의 사간 조태언(趙泰彦)은 민택수를 옹호하면서 다시 정언으로 복귀하도록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상소문 가운데 영조의 심기를 강하게 건드리는 용어를 쓴 게 화근이 됐다. 이 표현 때문에 급기야 영조는 조태언에게 극형을 내리겠다는 명을 내렸다.

 

문제의 단어는 바로하필이라는 용어였다. 조태언은민택수가 대간으로서 바른 말을 한 것인데하필물러날 필요가 있느냐?”라고 표현했다. 영조는 이하필이라는 표현이 매우 중의적이고, 같은 노론끼리 싸고돌며 오로지 자신의 당을 위해서 왕을 배반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영조는 탕평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특히 당파를 조장하는 행태에 대해 지나치다고 느낄 정도로 엄하게 처벌하고 있었다. 영조는 조태언의 목을 베라며 호통을 쳤는데, 주변 신하들이 언관의 말 한마디 때문에 극형에 처하는 것은 안 된다며 극구 말렸다. 그러자 영조는그나마 머리는 붙여 놓은 형벌을 내리겠다며 팽형을 거론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명령도 그냥 해프닝으로 끝났다. 신하들의 계속되는 상소로 인해 결국 조태언을 유배보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래도 어쨌든 조선에서 실제로 팽형이 실행될 뻔했던 유일한 사례였다. 영조는 뇌물죄를 강력하게 처벌하기 위한 팽형을 당시 파당을 조장하고 탕평정책을 흐트러뜨리는 자들에 대한 처벌로 가져다 쓰려 했다. 가혹한 형벌로 자신의 의지를 보이려 했던 것이다. 혜정교에서 팽형 흉내를 내는 시체놀이도 거의 시행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혹시 정말 있었다고 해도 한 번 벌어진 이벤트성 행사에 불과했을 것이다. 모두 이벤트의 효과를 노린 정치 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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