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창조경영
편집자주
유대인은 전 세계 인구의 약 0.2%에 불과한 소수민족입니다. 역사적으로도 모진 핍박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천재적인 두뇌와 시대의 흐름을 볼 줄 아는 안목을 바탕으로 전 세계 각 분야에서 최고위층의 지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습니다. 비주류에서 주류로, 주변부에서 핵심부로 올라선 유대인들의 지혜를 통해 초경쟁 시대의 생존 전략에 대한 통찰을 얻어 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겨 입는 바지는 뭘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청바지라는 데 이견은 없을 것이다. 청바지는 사시사철 아무 때나 입을 수 있는데다 요즘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공식 석상에서 입는 것까지 자연스러워졌다. 아마 우리뿐 아니라 세계인들이 가장 즐겨 입는 바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청바지의 유래는 어떻게 될까. 누가 만들었고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
청바지 브랜드는 워낙 많지만 대표적인 브랜드 둘만 꼽으라면 아마 전문가들은 리바이스와 캘빈클라인을 선택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두 브랜드 모두 회사 창업주의 이름을 그대로 붙인 것인데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유럽에서 미국, 그것도 뉴욕으로 이민 온 유대인 혈통이란 점이다. 이 두 브랜드의 성장 스토리를 살펴보자.
청바지 브랜드의 양대 산맥, 리바이스와 캘빈클라인
19세기 후반 미국 사회를 지배한 단어는 한마디로 ‘골드러시(gold rush)’다. 모두가 황금 노다지를 찾아 서부로 달려가던 시절이었다. 이때 생긴 대표적인 도시가 바로 샌프란시스코다. 한두 해 사이에 갑자기 30만 명이 몰려들어 하루아침에 서부의 뉴욕이 생겨났다는 말까지 나왔다. 1850년 샌프란시스코로 몰려든 인파 중에는 리바이 스트라우스(Levi Strauss)라는 21살 된 청년도 끼어 있었다. 3년 전인 1847년 독일에서 이민 온 유대인 가족 7남매 중 막내였던 리바이는 샌프란시스코로 먼저 이주해 포목장사를 하고 있던 누나를 찾아 왔다.
당시 유럽에서 빈손으로 이민 와 자본이 없었던 유대인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행상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리바이도 광산을 돌아다니며 포목을 파는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광부들은 포목보다 작업용 바지를 원하는 것 같았다. 작업하기 좋은 두껍고 질긴 바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머리 회전이 뛰어나고 타고난 장사꾼이었던 리바이는 곧바로 텐트용으로 생산된 데님을 이용해 바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청바지의 탄생이다. 청바지는 광부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1853년 미국 최초의 대중 의류 브랜드인 ‘리바이스(levi’s)’는 그렇게 태어났다.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여생을 마친 리바이는 샌프란시스코 유대인 사회의 대부였다. 그는 비유대인에게도 많은 자선활동을 펼쳤다. 1902년 그가 죽었을 때 시 정부는 그의 장례식이 열리는 날을 공휴일로 선포해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한 유대인 청년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청바지는 이후 동부 도시 근로자 사이에서 유행하면서 미국 전역으로 확산됐다. 1940년대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들을 통해 전 세계로 확산됐다. 특히 1950년대 중반에는 영화 ‘이유 없는 반항’의 제임스 딘, ‘위험한 질주’의 말런 브랜도 등이 영화 속에서 입고 나오면서 청바지는 그야말로 야성과 저항 등 청년 문화를 대변하는 상징코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청바지는 누구나 편하게 입는 싸구려 작업복 이미지였다. 이런 청바지를 고가의 명품 브랜드 바꿔 놓은 게 바로 캘빈 클라인이다. 1942년 뉴욕의 빈민가 브롱크스에서 태어난 캘빈 클라인은 유명 디자인 스쿨인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를 졸업하고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1974년 유대인 친구 베리 슈월츠와 함께 CK Jeans를 론칭한다. 이들이 주목한 건 당시 고급 의상만 취급하던 디자이너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던 청바지였다. 수요가 많은 청바지를 고급 패션화하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남과 다름’을 추구하는 유대인다운 창의적 역발상인 셈이다.
캘빈 클라인은 청바지 뒷부분에는 상표 이름을 새겨 넣고 펑퍼짐하기만 하던 라인을 타이트하게 디자인했다. 그의 창의적인 상상력은 광고에서 절정을 이룬다. 1980년 당시 한창 인기를 끌고 있던 15살짜리 청순 이미지의 영화배우 브룩 실즈가 TV 광고에 몸에 딱 붙는 청바지를 입고 나와 “there’s nothing between me and my calvin(나와 캘빈클라인 청바지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어요)”이라며 마치 속옷을 입지 않고 있다는 뉘앙스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한 멘트를 던진다. 이 광고는 당시 보수적이었던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으면서 논란의 중심에 선다. 광고를 둘러싼 선정성 논쟁이 확산되면서 ‘섹시한 청바지’는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렸고 캘빈클라인 청바지는 섹시함을 상징하는 고급 브랜드가 되면서 청바지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미국 의류 산업에 뿌리 깊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유대인
유대인들의 남다른 상상력과 창의력이 발휘된 옷은 청바지만이 아니다. 아마 미국 의류 산업의 성장 전반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최근 세 차례 올림픽의 미국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만들 정도로 미국의 대표 브랜드로 꼽히는 ‘폴로’를 일군 디자이너 랄프 로렌(Ralph Lauren)이다. 1939년 뉴욕 브롱크스에서 태어난 랄프 로렌은 성직자가 되려고 종교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돈이 없어 학업을 중도 포기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장갑회사 점원으로 취직한 것도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페인트공이었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색상 감각에 유대인 특유의 상상력을 갖고 있던 랄프 로렌은 혼자 곁눈질로 디자인을 익혀 나갔다. 28살 때인 1967년 당시 2.5인치(약 6㎝)짜리 넥타이가 유행하던 때에 파격적으로 4인치(약 10㎝)의 폭넓은 넥타이를 만들어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힘입어 다음해인 1968년 친구에게 5만 달러를 빌려 ‘폴로 랄프 로렌’을 창업했고 그의 디자인은 ‘패션의 혁명’이란 평가를 받으며 승승장구, 세계 최대 규모의 의류회사로 자리매김했다.
사실 미국 의류 산업엔 유대인의 뿌리가 깊다. 19세기 후반 약 200만 명의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이민을 왔다. 이들은 노동집약산업인 의류업계를 떠받치는 기반이 됐다. 당시 유대인 노동자들의 60% 이상이 의류업계에 종사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경영에도 참여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1890년경에는 뉴욕 의류공장의 95%를 유대인이 장악했을 정도다. 당시 유대인들은 ‘주문-가내생산’ 중심의 ‘홈메이드(home-made)’식 산업구조를 상품을 만들어 놓고 파는 ‘레디메이드(ready-made)’ 시스템으로 바꾸면서 대량 생산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23년 유대인인 윌리엄과 이다 조젠탈 부부가 세계 최초로 현대식 브래지어를 만들어 대량 생산에 들어간 것도 이런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적 감각이 탁월한 유대인은 시간이 갈수록 몸을 쓰는 생산 분야보다는 머리를 쓰면서도 큰돈을 벌수 있는 디자인 쪽으로 방향을 바꿔나갔다. 캘빈 클라인이 졸업한 FIT가 유대인 자금으로 성장한 학교라는 것도 의류 패션 분야에 대한 유대인들의 관심도를 말해준다. 갭, 게스, 조다쉬, DKNY, 토미힐피거, 케네스콜, 리즈클레이본, 아베크롬비&피치, 빅토리아시크릿, 존스뉴욕, 나인웨스트 등 유대인들의 손에서 태어난 브랜드는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다.
미국 유통업계를 움직이는 세력
고급 패션 업체들은 주요 매장이 백화점 같은 대형 고급 유통업체들 안에 있다. 두 업종이 관련도가 상당히 높은 공생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미국의 유통시장을 꽉 잡고 있는 사람들 또한 유대인이라는 점이다. 앞서 칼럼에서 여러 번 강조했듯 유대인들의 강한 협동심은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발 빠른 비즈니스 성장에 큰 도움이 되곤 한다.
미국에선 매년 11월 넷째 주 목요일이 추수감사절이다. 우리나라의 추석처럼 1년에 한번 가족들이 다 모이는 큰 명절이다. 추수감사절은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로 이어지는 연중 최대 쇼핑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다. 미국 백화점 매출의 절반 이상이 바로 이 한 달 반 사이에 이뤄지는 만큼 유통업체들 입장에서는 정말 중요한 날이 아닐 수 없다. 백화점으로서는 추수감사절이 더 없이 기쁜 이유다.
추수감사절에는 뉴욕에서 미국 전역에 TV로 생중계 되는 퍼레이드가 열린다. 퍼레이드가 개최되는 장소는 매년 변하지 않는다. 바로 뉴욕 한복판 32스트리트 코리아타운 인근에 위치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메이시스(Macy’s)백화점 앞이다. 그런 날을 상징하는 퍼레이드가 열릴 정도로 메이시스백화점은 미국 유통산업을 대표한다고도 볼 수 있다.
추수감사절과 메이시스는 더 깊은 인연이 있다. 1940년까지 추수감사절은 11월 마지막 주 목요일이었다. 그런데 메이시스의 모회사(지주회사)인 페더레이티드 디파트먼트 스토어의 프레드 라자루스 주니어 회장이 당시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건의해서 1주일을 앞당겼다. 대공황 후유증으로 어려운 미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연말연시 쇼핑시즌을 늘려야 한다며 로비를 했고 의회도 이를 받아들여 1941년부터 한 주일을 앞당겼다.
그동안 여러 차례 인수합병을 거쳐 왔지만 미국 내 800개가 넘는 점포를 갖고 있는 메이시스는 시카고에 본사를 두고 있는 시어스로벅(Sear’s, Roebuck and Co)과 함께 미국 백화점 역사를 일군 실질적인 두 개의 수레바퀴로 평가받는다. 두 백화점 모두 창업주가 유대인은 아니지만 회사를 성장시킨 실질적인 주인은 모두 유대인이다. 이 두 회사뿐 아니라 짐벨스, 니만마커스 등 많은 유대계 백화점들이 대부분 비슷한 성장 스토리를 갖고 있다.
유대인들이 백화점을 일군 비결은 무엇일까. 먼저 메이시스의 토대를 구축한 스트라우스 가문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1852년 독일을 떠나 미국 조지아주에 정착한 라자루스 스트라우스는 장남 이시도르와 함께 행상을 시작했다. 당시 맨손으로 이민와서 사업 밑천 한 푼 없었던 많은 유대인들과 비슷한 출발이다. 도자기를 비롯해 바늘, 실, 감기약, 손거울 등 온갖 잡동사니를 등에 메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며 팔았다. 생활이 절박했던 유대인 행상들은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 시골까지 구석구석 찾아갔다. 도시 구경을 못하고 살던 시골 사람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기도 했다.
라자루스와 이시도르는 돈을 좀 벌자 마차를 사서 장사를 했고 돈을 더 벌자 몫이 좋은 장소에 상점을 차렸다. 당시 미국에선 옷은 옷 가게, 구두는 구두 가게식으로 한 가게에서 한 가지 물건만 파는 이른바 전문점 형태의 상점이 자리를 잡고 있던 때였다. 이미 기존 질서가 정립된 시장에 후발주자로서, 그것도 맨손으로 뛰어든 유대인들로서는 뭔가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다. 그런 불리한 상황을 역이용해 만들어 낸 것이 ‘많은 상품을 한군데서 파는’ 만물상, 즉 행상으로 가지고 다니던 여러 가지 제품을 한곳에서 다 파는 백화점이었다. 미국 최초의 백화점은 이렇게 출발했다. 앞에서 설명한 청바지의 발전사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남과 다름’을 추구하는 유대인의 창의적 발상이 백화점 같은 유통산업의 성장에서도 그대로 묻어나는 셈이다.
메이시스의 특징은 고품질과 저가격이었다. 경쟁사들과 가격 전쟁을 벌여 한때 수익이 악화되기도 했지만 ‘가장 좋은 제품을 가장 싸게 판다’는 인식을 심어주면서 승승장구했다. 이시도르의 동생 중 나탄은 미국 유대인협회 회장을 지내는 등 자선사업가로 활동했고, 막내 오스카는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 미국 최초의 유대인 장관이 되기도 했다. 또 가족들이 구겐하임, 골드만삭스, 리먼브러더스, 슐츠버그(뉴욕타임즈 소유자) 등 미국의 유명 유대인 가문과 혼인을 맺어 미국에서 가장 유력한 유대인 가문으로 꼽히기도 한다. 메이시스를 일군 이시도르 부부가 1912년 타이태닉호 침몰로 목숨을 잃은 것은 이 가족의 유명한 비극 스토리이기도 하다.
독일계 유대인으로 메이시스의 라이벌 격인 시어스로벅을 키운 줄리우스 로젠왈드(Julius Rosenwald)는 각종 경영학 교과서에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회사를 성장시킨 모범사례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시어스로벅은 1893년 정식 설립됐는데 당시 미국 인구의 65% 정도가 농촌에 살고 있는 점에 착안한 로젠왈드는 ‘우편주문방식’이란 영업을 처음 개발했다. 물건을 보지 않고 사는 데 대한 우려를 없애주기 위해 무료배달은 물론 “만족하지 않으면 돈을 돌려준다”는, 당시로서는 아주 파격적인 ‘머니 백 개런티(money back guarantee)’ 전략을 구사했다. 당시 언론들은 컨슈머리즘(consumerism), 다시 말해 미국 최초의 ‘소비자 중심주의’ 기업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가면서 로젠왈드의 경영 기법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우편주문은 급속도로 늘어났다. 1906년에는 하루 주문이 2만 건,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10만 건에 달하기도 했다. 쏟아지는 주문을 소화하기 위해 도입한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은 나중에 헨리 포드가 자동차 조립라인을 자동화하는 데도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백화점과 같은 원거리 영업이 기본인 유통산업은 다른 산업보다 특히 자본 동원력이 중요하다. 월가의 금융자본을 장악하고 있는 친구들이 많은 유대인들이 서로 협력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영역인 셈이다. 지금도 미국 대도시는 물론 지방 백화점들도 거의 대부분 유대계 자본으로 움직인다. 유대인들의 강한 협동심을 생각하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 탓에 유대인 인맥을 동원하지 않으면 제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백화점에 코너를 내는 것은 물론 납품조차 쉽지 않은 게 엄연한 현실이다. 유대인 패션 상품들이 유대인 백화점의 가장 몫 좋은 곳에 들어서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인 셈이다.
연말연시 인사말까지 바꿔놓은 유대인 파워
유통산업에서 막강해진 유대인의 영향력은 연말연시 인사말까지 바꿔놓고 있다. 통상 어느 나라든지 12월에 가장 자연스런 인사말은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다. 하지만 세계 최대 도시라는 뉴욕에서는 이게 좀 애매하다.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말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요즘 들어서는 “해피 할러데이(Happy Holidays)”란 인사말을 훨씬 더 많이 쓴다. 여기엔 바로 유대인들의 힘이 숨어 있다.
유대교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볼 때 기독교와는 달리 예수 탄생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따라서 크리스마스가 이들에겐 별다른 기념일이 아니다. 미국의 유통업체들에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매출을 올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회다. 하지만 “메리 크리스마스”로는 뉴욕 지역의 큰손인 유대인 부자들을 유혹하기 어렵다. 그런데 때마침 크리스마스와 비슷한 시기에 ‘하누카’라는 유대인 명절이 있다. 따라서 아예 이 두 기념일을 포괄하는 “해피 할러데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백화점 같은 미국의 유통산업을 유대인들이 꽉 쥐고 있는 것도 “메리크리스마스” 대신 “해피 할러데이”란 인사말이 확산되는 데 한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요즘 창조산업, 창의산업이라는 말이 자주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경우를 보면 창조산업, 창의산업이라는 게 별도로 존재하는 것 같지 않다. 어떤 산업이든 창의성이 가미될 경우 ‘대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창의성이 내재돼 있듯 모든 업종도 창의성이 가미되면 그 자체가 창의산업, 창조산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육동인 커리어케어 대표 [email protected]
필자는 서울대 서양사학과와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공부했다. 한국경제신문에서 뉴욕특파원을 거쳐 논설위원, 금융부장, 사회부장을 역임했다. 국회사무처 공보관 및 홍보기획관직도 맡았다. 현재 한국컨설팅산업협회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 <유대인처럼 성공하라(2004)> <육동인, 소통 정치를 말하다(20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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