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1번가가 장안의 화제가 되고 고객이 모일 수 있으려면 들어와 있는 사람이 장사가 잘되고 돈이 남아야 되지 않겠나? 이게 잘돼야 백화점도 잘되고, 호텔도 잘되고, 우리가 좋을 게 아닌가?”
“롯데가 제시하는 공간에서 롯데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그 공간에서 뭔가 본인이 추구하는 긍정적 결과물을 얻어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롯데에 방문하고 머무르고자 할 것이다.”
롯데그룹 창업자 신격호 총괄회장(91)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데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기업가다.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이 개장하기 약 2달 전인 1979년 10월, 소공동 지하에는 롯데1번가라고 불리는 지하쇼핑 아케이드가 생겼다. 롯데1번가는 당시 2가지 차원에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우선 지하공간의 재창조라는 점에서 의의가 컸다. 지하는 어둡고 좁은 곳이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난 것이다. 신 총괄회장은 롯데1번가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고급 상점들을 유치하며 고객의 동선을 계획적으로 설계했다. 다른 한 가지는 롯데1번가 바닥에 이탈리아산 대리석이 깔렸다는 점이다. 1970년대 말은 국내에 대리석을 깐 공간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지만 신 총괄회장은 최고급으로 꾸며 놓아야 고객이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고급 자재로 수준 높은 지하 쇼핑 상가를 만들었으니 이곳의 임대로 수준이 매우 높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롯데는 200여 명의 업주를 일일이 만나 임대료를 어느 수준으로 책정하면 입주한 업주들도 수익을 내면서 장사를 할 수 있는지를 조사했다. 이를 바탕으로 예상과는 달리 싼 가격에 임대료를 책정했다. 이는 신 총괄회장이 롯데1번가에 들어와서 장사를 하는 사람이 돈을 많이 벌어야 롯데1번가가 성공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잠실 롯데월드를 개발할 때도 신 총괄회장의 ‘모객’에 대한 독특한 시각이 빛을 발했다. 잠실 롯데월드가 지어진 곳은 원래 황량한 벌판이었다. 석촌호수는 비가 오면 한강이 범람해서 물이 고이는 유수지였고 주변은 참외밭뿐이었다. 이런 곳에 호텔과 백화점, 테마파크를 만든다고 하니 롯데 내부에서는 걱정이 많았다. 배후 상권이 없어 사람들을 불러모을 방법이 막막했기 때문이다. 이때 신 총괄회장은 “상권은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고 직원들을 독려했다. 이처럼 신 총괄회장은 고객에게 필요한 상품을 제공하고 고객이 즐겨 찾는 매장을 만들면 멀리서도 고객이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둘 이상의 그룹을 연결시켜주는 플랫폼 비즈니스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진 것은 2000년대 들어서부터다. 토마스 아이젠만 하버드 경영대 교수 등이 2006년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에 쓴 ‘Strategies for Two-Sided Market’을 보면 플랫폼 운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가격 전략이다. 플랫폼에 참여하는 두 그룹 중 상황에 맞게 한 그룹에는 보조금을 줘 쉽게 플랫폼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반면 상대 그룹을 만나기 위해 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는 다른 그룹에는 과금하는 것이 좋다고 지적했다.
과거 애플의 맥킨토시 운영체제(OS)는 소비자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개발자들에게 소프트웨어 개발 키트(SDK)를 1만 달러에 팔았다. 반면 마이크로소프트(MS)는 윈도 SDK를 공짜로 개발자들에게 나눠줬다. 가격에 부담을 느낀 개발자들이 맥킨토시 관련 개발을 꺼리면서 애플은 생태계 조성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애플은 보조를 해야 할 그룹(개발자)과 과금을 해야 할 그룹(소비자)을 잘못 선택했고 MS는 선택을 잘해 윈도가 시장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물론 스티브 잡스는 이 실패를 교훈 삼아 앱스토어 출시 때는 큰 성공을 거뒀다.
롯데1번가가 입주 상인들에게 비싼 임대료를 물리는 대신 싼 임대료를 책정한 것은 경쟁력 있는 상점들이 들어와야 소비자들이 몰릴 것이라고 판단한 신 총괄회장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또 고객에게 필요한 상품을 제공하고 고객이 즐겨 찾는 매장을 만들면 허허벌판에 있는 상점에도 손님이 올 것이라는 판단은 플랫폼 비즈니스에 대한 이해 없이는 나오기 힘든 결정이다. 신 총괄회장의 머릿속에는 이미 1970년대부터 플랫폼 사업에 대한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 같다.쫑표(2010).ai
김선우 기자 [email protected]
필자는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에서 인문지리학을 전공하고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MBA 학위를 받았다. 2001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사회부, 문화부, 경제부, 산업부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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