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제일제당, 제일모직을 세울 당시에 우리나라는 6·25로 폐허가 돼 온 나라가 극심한 물자난에 허덕이며 대부분의 생필품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물자가 풍부한 지금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될지 모르나 당시로서는 생필품의 수입 대체를 위해 생산공장을 짓는 것이 가장 절실하고 시급한 문제였다. 기업은 누가 뭐라고 해도 그 시대의 여건과 상황에 맞는 업종을 선택해서 합리적으로 경영을 해야 한다.”
- 1985년 4월22일 KBS 대담에서
1980년 봄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1910∼1987년)는 일본의 경제계획을 담당했던 이나바 히데조 박사를 만났다. 이나바 박사는 일본이 1973년 오일 쇼크 이후 정책을 전환해 제철, 조선, 석유화학 등 기간산업의 생산규모를 대폭 억제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동안 과잉생산으로 많은 기업이 도산을 했고 대외적으로는 덤핑 수출로 국제 무역마찰이 심화됐기 때문이다. 이나바 박사는 “대신 반도체, 컴퓨터, 신소재, 광통신 등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기술 분야를 전략 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그 결과 수출은 늘고 외화 수입이 급증했다. 일본의 살 길은 경박단소(輕薄短小)의 첨단기술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경박단소는 가볍고 얇고 짧으며 작은 제품 제조업을 뜻한다.
조선과 제철 등 중후장대(重厚長大)한 중화학공업 대신 첨단산업 육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호암은 무릎을 쳤다. 호암이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분야는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 사업이었다. 반도체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풀기가 쉽지 않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지만 호암은 특유의 스피드로 사업을 진행했다. 1982년 반도체·컴퓨터사업팀을 꾸렸고 1983년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투자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1984년 5월 기흥에 첫 반도체 공장을 준공했다.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반도체 공장을 건설한 것이다.
요즘 삼성전자의 실적을 이끌고 있는 제품은 스마트폰을 포함한 휴대전화지만 사실 삼성전자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의 부품부터 TV, 가전, 스마트폰의 완제품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삼성전자의 튼튼한 기초를 호암은 인생의 황혼기인 70대에 단 5년 만에 확립한 셈이다. 이는 반도체 산업의 시대적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닫지 않고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호암은 시대의 흐름을 아는 경영자였다. 삼성은 해방 후와 한국전쟁 중에는 무역으로 물자를 조달했고 전후에는 설탕과 같은 수입 대체산업에 손을 대 자립경제의 틀을 만들었다. 이후에는 중화학공업에 투자하며 기간산업 기반조성에 힘썼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최첨단 산업인 반도체 사업의 기반을 마련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2005년 내놓은 ‘한국기업 성장 50년의 재조명’에 따르면 한국의 기업들은 기반형성기(1955∼1970년), 고도성장기(1971∼1987년), 전환기(1988∼1997년), 재도약기(1998∼2005년)를 거쳤다. 삼성은 각각의 시기마다 꼭 필요했던 사업을 하는 주력기업을 가지고 있었다. 삼백산업이 부상했던 기반형성기에는 제일제당, 종합상사와 건설사가 대표기업이었던 고도성장기에는 삼성물산, 전자와 자동차 산업이 대표업종이었던 전환기 이후에는 삼성전자가 그룹의 대표주자였다. 호암이 필요성을 느끼고 남들보다 한발 앞서 세운 기업들이 역할을 해주었다.
1965년 국내 매출액 100대 기업 중 2000년대 중반까지 살아남은 기업은 12개에 불과하다. 1900년 미국의 상장회사 가운데 남아 있는 기업은 GE뿐이다. 기업 환경의 패러다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기업은 살아남지 못한다. 1938년 삼성상회라는 가게로 시작한 삼성은 호암의 시대적 흐름을 읽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튼튼한 기반을 다졌다.
김선우 기자 [email protected]
필자는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에서 인문지리학을 전공하고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MBA 학위를 받았다.
2001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사회부, 문화부, 경제부, 산업부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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