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모피, 보석, 향신료, 석유 이 다섯 가지 물건들의 공통점은 바로 역사를 바꾼 물건이란 사실이다. 인류 문명의 기본이자 재화의 개념으로 ‘거래’를 형성한 소금, 중요한 무역 품목으로 고조선 경제사의 시작이자 고조선 개척 및 개발의 일등 공신인 모피, 보어전쟁을 유발해 보어인의 대학살이라는 전대미문의 참상을 일으킨 보석, 대항해 시대의 개막과 식민지 획득경쟁의 목적이 된 향신료, 상처를 치료하는 바르는 연고에서 국가적 존망을 위협하는 상품이 된 석유가 바로 인류사와 함께하며 사람들을 울고 웃게 한 주요 상품들이다.
소금, 모피, 보석, 향신료, 석유 이 다섯 가지 물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역사를 바꾼 물건이란 사실이다. 모든 문명 발상지의 공통점은 소금이다. 소금이 없는 곳에서는 문명이 발달하기 힘들었다. 모피가 없었다면 시베리아와 북아메리카는 별 볼일 없는 땅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보석을 둘러싼 갈등 덕분에 공산주의가 태어났다. 동양이 가진 향신료 덕에 서양은 동양에 관심을 가졌고 동서양 문명의 교류가 시작됐다. 석유를 빼놓고 현대사를 얘기하긴 어렵다. 오늘은 그런 것에 관한 책 <세상을 바꾼 다섯 가지 상품 이야기>를 살펴본다.
소금
역사적으로 소금이 생산되는 곳이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소금으로 거래가 시작되고, 거래는 시장을 만들고, 시장이 발달한 곳에서 경제는 번성했다. 천일염은 태양과 바람의 축복이다. 그런데 만드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우선 염전을 꾸밀 갯벌이 있어야 한다. 둘째, 물을 증발시킬 정도로 덥고 건조해야 한다. 셋째, 비가 적고 바람이 있어야 한다. 지중해 연안 일부, 인도 서부, 호주 서부와 한국 등이 여기에 적합하다. 한국의 서해안은 세계 5개 갯벌 중 하나이자 아시아 대륙의 유일한 대형 갯벌이다.
로마가 발전한 이유 중 하나도 소금이다. 로마는 남부 이탈리아의 조그만 어촌에서 소금 거래를 하던 몇몇 상인들이 만든 나라다. 페니키아시대에 로마 근교 테베레강 하구에 건설된 인공 염전에서 소금을 만들었다. 유럽 최초의 인공 해안 염전이다. 소금은 생산도 힘들지만 운송은 더 힘들다. 당연히 운송비가 많이 들었다. 낙타 네 마리에 싣고 온 소금 운송비로 세 마리 낙타가 싣고 온 소금을 줘야 했다. 통행세인 수입세와 관세도 물어야 했다. 통행의 두 가지 장애는 울퉁불퉁한 길과 도적들이다. 이들은 길을 잘 닦아놓고 통행세를 받았다. 2세기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는 소금과 금을 얻기 위해 다치아인들이 살고 있던 땅을 정벌해 큰 암염광산을 획득했다. 이 땅이 로마인의 땅이란 이름의 루마니아다. 로마 초기에는 소금이 화폐 역할을 했다. 그래서 관료나 군인에게 주는 급여를 살라리움(salarium)이라고 했다. 여기서 급여를 뜻하는 샐러리가 나왔다. 이외에도 소금 관련한 말이 많다. 독일어 할레(Halle)는 ‘소금을 만드는 집’이란 뜻이다. 미국의 솔트레이크시티, 터키의 투즐라,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모두 소금과 관련한 곳이다. 한국은 1907년 주안에서 최초의 천일염이 만들어졌다.
베네치아는 훈족의 침입으로 생겨난 해상도시다. 당시 로마인은 훈족을 피해 갈대의 늪지대로 이전했는데 무사히 섬에 도착한 후 ‘베니 에티암’이라고 외쳤다. 나도 여기에 왔다는 뜻이다. 여기서 베네치아란 말이 나왔다. 원래 베네치아는 석호에서 나는 숭어와 장어, 소금 외에는 별 생산품이 없었다. 그러다 7세기 이후 해수면이 내려가면서 소금 생산에 좋은 조건이 만들어졌다. 여러 개의 염전을 만들고 펌프와 수문을 이용해 바닷물의 염도를 점점 높여 다음 단계로 보내는 방식이다. 베네치아는 소금 독점을 기반으로 배를 만들어 바다로 나갔다. 대외 교역을 위해서였다. 10세기경부터 아드리아 해안가 염전에서 대량으로 천일염을 생산해 알프스 지역에 공급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이들은 소금 독점을 위해 여러 차례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14∼15세기에는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소금 생산을 할 수 없었다.
소금은 여러 사건을 일으켰다. 당나라 황소의 난이 대표적이다. 9세기 당나라 말기 정부는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지나치게 비싼 값에 소금을 팔았다. 원가의 20배에 해당하는 값이다. 개인이 소금을 만들려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고 만약 걸리면 왼쪽 발가락을 잘랐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는 법이다. 당연히 암거래가 생겨났다. 황소란 사람은 과거에 낙방한 후 소금장수를 시작했는데 이런 부당한 것을 참지 못하고 난을 일으킨다. 그게 유명한 황소의 난이다. 프랑스혁명의 원인 중 하나도 소금이다. 정부가 소금에 불공정 세금을 매겼고 이에 따라 암거래가 성행하면서 악순환이 계속됐다. 백성에게는 지나치게 비싼 세금을 매기고 귀족에게는 염세를 면제해줬다. 만약 소금 암거래를 하다 걸리면 200리브르의 벌금을 내야 했는데 당시 노동자의 1년 수입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또 ‘G’라는 낙인을 찍어 갤리선에서 죽을 때까지 노를 저어야 했다. 인도 독립의 시발이 된 소금 행진도 영국인의 염세에 반대해서 일어난 사건이다. 옛날부터 소금은 국가가 관리했다는 것은 글자만 봐도 알 수 있다. 소금의 한자인 소금 염(鹽)이 그렇다. 글자를 파자하면 신하 신(臣), 소금 로(鹵), 그릇 명(皿)으로 돼 있다. 그릇에 있는 소금을 신하가 관리했다는 의미다.
모피
모피 역시 세상을 바꾸었다. 모피 사냥 덕분에 개발된 곳이 동토의 땅 시베리아와 북아메리카다. 모피 사냥꾼의 시베리아 개척 속도는 군대의 진격 속도보다 빨랐다. 모피는 대표적 사치품이다.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최초로 모피에 세금을 붙였다. 시베리아 검은담비 모피 가격은 사냥꾼 한 명이 검은담비 몇 마리만 잡아도 생애를 편하게 보낼 정도였다. 한때 러시아의 비버 가죽 수출액이 재정의 11% 정도를 차지했다. 명품 모피의 대명사 비버는 북아메리카의 역사를 바꾸었다. 비버로부터 귀한 해리향도 얻었다. 비버가 짝짓기를 할 때 상대를 유인하려고 분비하는 아주 강한 향을 지닌 물질이다. 유럽에서는 고급 향수의 재료로 쓰인다. 비버에 눈독을 들인 네덜란드 상인들은 뉴욕 맨해튼 지역을 주목했다. 처음에는 그곳에 가죽 거래를 위한 교역소를 세웠고 이듬해 24달러를 주고 아예 맨해튼을 샀다. 남단의 배터리파크는 역사적 거래가 이뤄진 장소이다. 네덜란드인은 이곳에 뉴암스테르담을 건설했다. 지금도 배터리 남단은 네덜란드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인디언과의 싸움이 치열했고 인디언의 습격을 막기 위해 통나무벽을 쌓았다. 1653년 맨해튼 남단에 영국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끝을 뾰족하게 깎은 나무목책 벽(wall)을 세웠는데 나무목책이 세워진 거리와 인접한 거리를 ‘월가’라 불렀다.
이처럼 역사에서 모피 사냥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상 이상으로 높았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랬다. 고조선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담비 가죽은 우리의 중요한 무역 품목 중 하나였다. 특히 유목민족들이 사는 북쪽 초원길 쪽에 수요가 많았다. 내다 팔 사이도 없이 모피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중국은 담비 가죽을 동쪽의 세 가지 보물 중 하나로 쳤다. 일본에서도 담비 가죽은 인기였다. 발해 사신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의 왕족 하나가 담비 가죽 여덟 벌을 입고 나와 자신을 과시했다고 한다. 담비는 현재 한국에서 아주 귀한 동물이 돼버렸다. 하지만 고대에는 동옥저에서 담비 가죽으로 조세를 받을 정도로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