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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크세르크세스•다리우스•수양제... 100만 대군은 반드시 패배한다?

임용한 | 132호 (2013년 7월 Issue 1)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역사에는 가끔 100만 대군이 등장한다. 고대 그리스를 침공한 크세르크세스의 페르시아군, 가우가멜라에서 다리우스 3세가 알렉산더 대왕의 침공에 맞서 결집시켰다는 100만 대군, 100만은 아니지만 적벽대전에서 오·촉 연합군과 싸운 조조의 80만 대군, 그리고 고구려를 침공한 수양제의 110만 대군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패배했다는 것이다. 100만의 저주라고도 할 만하다. 사실 이 100만이라는 숫자는 진실이 아니다. 크세르크세스와 다리우스의 군대가 100만 명에 달했다는 건 과장된 소문으로 사실일 리 없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다만 정확하게 몇 명이었느냐에 대해서는 답이 없다. 그리스군보다 몇 배가 많았던 건 분명하다고 한다. 적벽대전에 투입한 조조의 병력도 겨우 15만 정도였다고 한다. 반면 수양제의 100만 대군은 100만이 넘었던 게 확실하다. 그리고 이 모든 과장된 군대 중에서 가장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수양제의 100만 대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고구려가 수양제의 100만 대군을 격퇴했다는 사실만 강조할 뿐 그 거대한 군대가 왜 처참하게 패배했는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다. 그러나 승리했든 패배했든 절실한 교훈의 절반은 적에게서 나온다. 진정한 승리자가 되려면 적에게서 배우는 자세, 적의 시각에서 승리와 패배를 분석하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지구상 최대의 강국이 역사상 유래 없는 최대의 병력과 물자를 동원하고도 패배한 원인을 한번 분석해 보자.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

6세기 말 중국은 516국이라고 불리는 혼란기였다. 삼국지의 무대인 삼국시대를 위나라를 계승한 진나라가 통일했지만 격렬한 내전으로 중국은 너무 약화됐다. 그 틈을 노리고 중국 주변에 있는 이민족들이 대거 중국으로 침공했다. 로마를 침공한 게르만 민족의 침공에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 그 결과 중국에는 삼국시대보다 더 극심한 내전이 시작됐다. 그 혼란을 극복하고 통일한 나라가 수나라였다.

 

수나라는 중국 통일에 성공했지만 중요한 역사적 교훈을 얻었다. 중국 주변의 이민족을 자유롭게 두었다가는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수나라는 주변의 이민족 국가들에 대해 과감한 정복전을 시행한다. 먼저 돌궐을 공격했고 그 다음 목표가 만주를 차지하고 있는 고구려였다.

 

수나라는 비장했다. 만주의 고구려를 방치했다가는 결국 중국이 침공당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둘 중 하나가 없어져야 한다는 결사적인 각오로 전쟁을 개시했다. 수양제는 609년에 고구려 침공 전쟁의 준비를 선언했고 2년 동안 준비를 계속했다. 전국에서 병력을 차출했고 산동에서는 전함만 300척을 건조했다. 전투 병력은 약 30, 나머지는 병참과 보조부대로 이들을 합하면 100만이 넘었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4번 침공했는데 100만 대군을 동원한 침공은 2차 침공이었다. 북경에서 출발한 수나라군은 요하를 방어선 삼아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고구려의 방어선으로 밀려왔다. 그리고 북쪽의 요충인 신성과 중앙의 요동성을 동시에 공격했다.

 

보급로 없이 감행한 무리한 진격

엄청난 병력으로 밀어붙였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군의 전투력은 대단해서 단 한 개의 성도 함락되지 않았다. 화가 난 수양제는 전쟁사에서 보기 힘든 대담한 작전을 명령한다. 고구려군의 방어선과 산성을 무시하고 30만의 정예부대를 고구려의 수도 평양으로 직공하게 했다. 중간에 있는 고구려군을 모두 무시하고 진격하는 것이므로 보급로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든 병사가 자기 장비와 100일치 식량을 메고 가게 했다. 하지만 이런 지시는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었다. 당시의 장비는 무겁고 불편했다. 여기에 현대처럼 간이식량도 없는 상황에서 100일치 식량 무게까지 합하면 개인당 운반해야 할 무게가 무려 240㎏이 넘었다. 따라서 100일치 식량을 직접 메고 가게 했다는 지시는 아무래도 과장인 듯하다. 상식적으로 한 명의 병사가 멜 수 있는 최대한의 식량은 한 달분 정도였을 것이다. 한 달분 식량이면 쉬지 않고 행군해도 겨우 평양성까지 도착할 정도의 식량밖에 되지 않는다. 즉 돌아올 식량, 평양에 도착해서 평양성을 포위하고 공격할 식량은 없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전쟁을 어떻게 할까? 수나라군이 마련한 비장의 방법은 산동반도에서 출발하는 5만 명의 수군이 해로로 식량을 운반하는 것이었다. 요동에서 출발한 육군은 대동강에서 수군을 만나 식량을 보급받고 평양성 공격을 감행할 계획이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대담한 계획이었다. 산동에서 대동강을 건너오기란 하루 이틀 정도만 항해하면 됐지만 바람이 제대로 불어준다는 전제 조건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건 오직 하늘의 뜻이었다. 게다가 계절풍이라는 것도 기상이변이 있기 때문에 몇 달을 기다려도 바람이 불지 않을 수도 있다. 해군이 건너오지 못하면 수나라군 정예병 30만 명은 굶주려 몰살할 상황이었다. 다행히 그 용기에 하늘이 감동했는지 수나라 해군은 순조롭게 항해에 성공했다. 하지만 너무 순조로워 예상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다. 고구려군은 전 병력을 국경방어에 투입했기 때문에 평양성을 지킬 병력도 별로 없었다. 해군의 병력은 겨우 5만이었다.

 

이 사실을 간파한 수군 제독 내호아는 해군 단독으로 평양성을 함락시켜 버리겠다는 욕심에 명령대로 육군을 기다리지 않은 채 단독으로 평양성 공격을 감행한다. 그러다가 고구려군의 계략에 걸려 참패하고 말았다. 겁이 난 해군은 산동으로 귀환했고 굶주리고 지친 수나라 육군은 그 직후에 평양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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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email protected]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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