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한국전쟁이라고 하면 우리는 언제나 어쩔 수 없이 지나치게 애국적이거나 이념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전쟁사와 냉전시대, 국제정치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정말로 극적인 전기와 역전이 많았던 전사이기도 하다.
북한군의 남진과 미군 참전
극적인 전환의 첫 번째 사건은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6월28일에 일어났다. 이날 김일성과 박헌영은 북한군의 진격을 3일간 정지시켰다. 그들은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면 남한에서 전국적인 인민 봉기가 발생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봉기는 발생하지 않았고 이 3일이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꿨다.
30일에 북한군은 공세를 재개했다. 그들은 급했다. 허비한 시간을 보상하고 의외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미국이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마무리해야 했다. 북한군은 최정예 부대인 4사단과 3사단, 105 기갑사단을 서울∼수원∼오산∼천안으로 이어지는 경부선 라인에 투입했다.
일본에 있던 미국의 극동군 사령부도 빠르게 대응했다. 7월1일 일본에 주둔 중이던 24사단 21연대 1대대가 수송기 편으로 부산으로 공수됐다. 대대장 스미스 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로 불리게 되는 이 부대는 신속하게 전선으로 향했다. 그들의 임무는 미군 주력이 투입될 때까지 최대한 북쪽에서 북한군을 저지하며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7월4일 스미스 부대는 죽미령에 포진했다. 스미스 중령은 두 번이나 직접 정찰을 한 끝에 오산과 수원 사이에선 이곳이 방어에 적지라고 판단했다.
도로를 따라 6㎞ 후방에 스미스 부대를 지원하는 52 포병대대가 있었다. 도로 건너 동쪽 고지에는 한국군 17연대가 자리 잡았다. 다시 그 남쪽에 한국에 막 도착한 34연대 1대대가 포진했다.
죽미령 전투와 평택 전투
7월5일 오전8시경 북한군의 T-34 전차가 도로를 따라 남하했다. 52포대의 105㎜포와 스미스 부대의 76㎜ 무반동총, 2.36인치 바주카포가 일시에 전차를 향해 불을 뿜었다. 그러나 탱크는 끄떡도 하지 않고 미군 진지에 포격을 날리며 유유히 남쪽으로 내려갔다. 유일한 효력타는 105㎜ 직사였다. 하지만 33대 중 파괴한 것은 겨우 4대였다. 나머지 전차들은 미군을 무시하고 계속 전진해서 평택 시가로 돌입했다.
10시 북한군 전차 3대의 엄호를 받는 4사단의 보병이 스미스 부대로 밀어닥쳤다. 미군은 박격포와 기관총 공격으로 첫 공세를 저지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노련했다. 그들은 도로 건너편에 스미스 부대의 고지보다 약간 높은 92고지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측방으로 우회해서 그곳에 기관총을 거치했다. 측면에서 기관총이 날라들고 후방으로 진출한 탱크가 미군 뒤쪽에서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포위됐다고 느끼자 스미스 부대는 동요했다. 미군은 포격지원을 요청했으나 오전에 평택으로 내려간 탱크들이 스미스 부대와 포병대 간에 가설한 통신선을 절단해 버렸다. 통신선을 도로를 따라 깔아놓은 게 실수였다. 박격포탄은 떨어졌고 공중지원도 없었다. 공포에 질린 병사들은 제대로 사격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후2시30분, 스미스는 후퇴했다. 406명 중 15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부상병 일부는 버려둬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중위 한 명이 동쪽 능선의 기관총을 수류탄으로 폭파한 덕분에 엄청난 피해를 방지할 수 있었다. 후퇴명령을 내리자마자 미군병사들은 총과 장비를 내동댕이치고 마구 달아났기 때문이다.
뒤에 있던 국군 17연대도 반나절을 버티지 못하고 방어선에서 밀려났다. 탱크도 탱크지만 탄약 고갈이 결정적이었다. 17연대에서 보급할 탄약을 적재하던 열차가 평택역에서 호주 공군의 오폭으로 파괴됐다. 34량분의 막대한 탄약이 한꺼번에 날아갔다.
다음은 오산∼평택을 연결하는 철도변에 주둔하고 있던 34연대 1대대 차례였다. 7월6일 북한군이 공격을 개시했다. 15분간 박격포와 전차포로 사전 포격을 가하고 보병들이 새까맣게 돌격해 오기 시작했다. 스미스 부대와의 전투에서 북한군은 미군이 별 것 아니라는 커다란 자신감을 얻었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미군 방어선의 한가운데로 정면공격을 감행했다. 공격 중심에 있던 1중대 2소대 선임하사인 콜린스 중사는 2차대전 참전용사였다. 그는 겨우 이틀 전에 2소대로 부임해서 아직 병사들을 잘 알지도 못했다. 밀집대형으로 달려드는 북한군을 보면서 그는 호기를 부렸다. “지금까지 내가 본 것 중 가장 완벽한 표적이다.”
그러나 그 완벽한 표적이 다가오는 동안 미군은 쳐다만 보고 있었다. 2소대원 대다수는 사격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참호에 머리를 쳐 박고 있었다. 일부는 적이 다가와 자신을 사살하거나 탱크가 밟고 지나갈 때까지 그러고 있었다. 사격을 해 보려는 병사도 있었지만 총이 나가질 않았다. 소대원 중 거의 절반의 소총이 고장이었다. 전날 내린 비로 총이 흙탕이 됐다. 하지만 진짜 원인은 비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총기 관리와 수입이 엉망이었다. 분해조립을 잘못해서 망가진 것도 수두룩했다.
중대장이 박격포 포격을 명령했지만 1명뿐인 관측병이 자기 근처에서 포탄이 터지자 바로 정신 이상을 일으켜 버렸다. 북한군은 단숨에 1중대 진지로 쇄도했다. 건너편 고지에서 망원경으로 지켜보던 대대장 아이리스 중령은 이탈리아 전선에서 무훈을 떨친 노련한 장교였다. 그도 전투 직전에 대대에 부임해서 연대장과는 아직 말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상태였다. 대대의 한심한 모습을 목격한 그는 주저하지 않고 후퇴명령을 내렸다.
미군의 패전원인
한국에서 미군의 첫 번째 전투는 미군의 완패이자 수치로 끝났다. 후퇴하는 미군을 본 한국군은 경악했다. 무기는커녕 철모, 탄띠조차 가지고 있는 병사가 거의 없었다. 군복도 벗어던지고 맨발로 걷는 병사도 있었다. 후방에 집결해 재정비를 하면서 가지고 온 기관총, 박격포와 같은 중장비와 탄약을 모았더니 1개 중대의 장비가 지프에 달린 트레일러 한 대를 채울 분량도 되지 않았다.
이 전투는 미국의 전사 연구자들에게도 큰 충격을 남겼다. 한국전쟁에 대해 지극히 비판적인 <콜디스트 윈터(Coldiest Winter)>의 저자 데이비드 핼버스템은 참패의 원인으로 미군이 전통적인 인종우월주의로 인해 북한군을 얕잡아 봤고 그 방심의 연장선상으로 병력을 집중하지 않고 분산 배치했으며 미군의 훈련이 덜 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사실 미군의 방심과 교만은 오래전부터 주장돼 왔다. 당시 미군은 자신들의 임무는 일종의 경찰 행동이라고 알고 있었고 미군이 참전했다는 사실만 보여도 북한군이 도망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군 지휘부가 방심하지 않았다고 해서 오산∼평택 전투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 게다가 경찰 행동 운운 하는 것도 과연 지휘부까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일지는 의문이다. 당시 일본에 있던 미군은 소총의 분해조립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훈련 상태가 형편없었다. 체력이 약해 한국의 가파른 산길을 오르지도 못했고 전술훈련은 해보지도 못했다. 게다가 2차 대전 후 미군 감축계획으로 1개 연대는 2개 대대로 축소돼 있었다. 장비도 형편없어서 평택 전투에서는 수류탄조차 지급받지 못한 중대도 있었다. 일본의 미군은 정상 전력의 40% 수준이었다. 그나마 2차 대전을 경험한 소수의 장교와 부사관들, 약간의 고참병이 유일한 자산이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대다수의 사병은 장교와 부사관의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도 않았다. 반면 북한군 주력은 3분의 1이 팔로군 출신으로 전투 경험자였다.
이처럼 준비 안 된 병사들에게 적이 강하다거나 너희보다도 훈련이 잘된 군대라고 말해 줬다가는 더 쉽게 공황에 빠져버렸을 것이다. 실은 이런 군대를 전장에 투입한다는 자체가 부당한 일이었기에 미국 국민으로선 분노할 일이었지만 이들을 투입할 명분이 필요했다.
병력의 분산배치도 24사단 장병들에겐 저주스런 사건이었지만 한국의 급박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만큼 하루가 급했다. 북한군이 서울에서 3일을 쉬지 않았더라면 북한군은 7월1일이나 2일 쯤에 이미 이곳을 통과하고 금강 방어선을 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스미스 부대와 34연대는 잘해야 낙동강 방어선, 아마도 그 중심인 왜관 정도에나 투입됐을 가능성이 높은데 역시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스미스 부대와 34연대의 전투는 전쟁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비극, 즉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하는 소위 악마적 선택이었다. 스미스 중령은 죽미령에서 부대원들에게 “우리가 포위되는 한이 있더라도 34연대가 방어진지를 완성할 때까지 버텨야 한다”고 주지시켰다. 그 자신도 작전의 목적과 불가피성을 알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오늘날 많은 기업이 경영사례를 분석하고 공부하는 데 열심이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오류를 범하기 쉽다. 하나는 상대의 천박한, 혹은 결정적 잘못을 발견하면 너무 쉽게 조롱하고 멍청한 결정이었다고 단정해 버리곤 한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결정일수록 그 원인은 멍청함이 아니라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배후사정에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같은 이유로 극적이고 과감하며 자극적인 사례를 찾고 이에 매료되곤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조심할 필요가 있다. 정말로 잘 조직되고 상황을 잘 통제해 예측하는 집단은 오히려 극단적이고 비이성적인 작전을 사용할 기회가 별로 없다. 대개 호기를 부리며 큰소리를 치는 사람은 무언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email protected]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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