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은 겨우 30년의 간극을 두고 있지만 전쟁의 양상은 판이하게 달랐다. 기술과 문명이란 관점에서 보면 20세기 1세기간의 변화는 인류 탄생 이래 이전까지의 총변화보다도 크고 빨랐던 탓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들인 입체전, 공중전, 공수부대, 상륙전, 전차전과 바주카포, 돌격소총 등 상당수의 전투방식과 전술, 부대, 무기체제는 거의 2차 세계대전에서 탄생하거나 정형화됐다.
그중에서 기념비적인 유산이 특수부대다. 영국의 SAS, 미국의 네이비실과 같은 특수부대의 활용도는 현대전에서 더욱 활성화되고 다양화하고 있는데 그 원조격인 부대가 영국의 코만도(Commando)다.
수치와 설욕
코만도의 시작은 오늘날의 특수전 개념과는 달랐다.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단숨에 함락되고 영국군은 덩케르트에서 간신히 철수했다. 영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막상 독일군이 영국 해안에 상륙하면 격퇴할 방법이 암담했다. 병력, 훈련, 무기 모든 게 부족했다. 천만다행으로 독일도 영국에 상륙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독일은 영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제멋대로 믿고 전쟁을 시작했다. 프랑스, 러시아와 동시에 전쟁을 해야 했던 독일로선 영국까지 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영국과 싸우려면 해군이 필요한데 가뜩이나 전략물자가 부족하고 전통적으로 해군이 약했던 독일로서는 육해공군 모두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육성할 수가 없었다.
그 덕에 영국은 쉴 틈을 얻었다. 그러나 판세 자체는 독일 공격, 영국 수비였다. 독일이 프랑스 해변에서 침공을 준비하고, 영국은 본토에 잔뜩 웅크려 있었다. 그때 영국 참모부의 클라크 중령이란 인물이 소규모 정예부대를 편성해 ‘히트 앤드 런(hit-and-run)’ 작전으로 독일군을 공격하자는 안을 제출했다. 어떤 특별한 전략적 목표를 달성한다기보다는 영국군이 겁먹고 수세에 몰려 있지 않다는 걸 과시하기 위한, 어찌 보면 억지에 가까운 애처로운 투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공부대의 창설을 추진하자 “덩케르트의 치욕을 갚겠다” “이대로 앉아서 기다리느니 나가서 싸우겠다”며 분기탱천한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나중에 코만도의 전설적인 지휘관이 되는 던포드 중령은 오직 그 심정이 코만도에 지원한 이유였다고 회고했다.
재미난 사실은 코만도라는 부대명이 보어 전쟁(1899년부터 1902년까지 영국이 남아프리카 땅을 식민지로 삼으려 하자 이에 반기를 든 원주민과 영국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보어인들이 영국군과 싸우기 위해 창설했던 게릴라 부대의 명칭이었다는 것이다. 우리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지만 영국은 세계인들이 코만도를 영국에서 탄생한 위대한 특수부대로 인식하도록 해 버림으로써 보어인에게 복수를 했다.
초기의 코만도는 말 그대로 격분과 투지의 덩어리였을 뿐이다. 코만도 용사는 모든 면에서 최고가 돼야 한다는 모토 아래 강훈련을 시켰다. 하지만 이 말을 뒤집으면 목표와 기능이 불확실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코만도는 특별한 병사를 모아 강훈련을 시킨 최정예부대라는 개념과 게릴라, 특수전 부대라는 개념이 불완전하게 혼합돼 있었다. 그 결과 코만도의 전쟁은 열정과 투지는 넘쳐나지만 경영전략이나 시장 상황에는 막연해 하는 집단이 겪는 길을 그대로 겪게 된다.
롬멜 장군을 납치하라
코만도의 초기 작전들은 언론용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황당했다. 아무 짝에 쓸모없고 독일군도 없는 섬에 상륙했다가 나오는가 하면 한적한 해변 마을에 상륙해 다리를 부수고 타이어 야적장을 태우고 돌아오기도 했다. 현지의 파르티잔 부대가 이런 전과를 올렸다면 박수쳐줄 만한 전과였지만 구축함과 잠수함에 정규군까지 동원한 작전으로서는 낯 뜨거운 성과였다.
기습작전이 별 효용이 없자 사령부는 북아프리카 전선과 크레타 방어전같이 특별한 용기와 투지를 요구하는 불리하고 힘든 전선에 투입했다. 코만도는 선전했지만 정규전에 투입되자 희생이 너무 컸다. 그렇게 소모하기에는 병사들의 자질과 투지가 아까웠다. 또 아무리 그들이 잘 싸워도 규모가 적어서 정규전에서 판세를 바꿀 전과를 올리기가 어려웠다.
1941년 북아프리카에 주둔 중이던 11코만도 부대의 키즈 중령이 롬멜 사령부를 습격, 롬멜을 생포하거나 사살하자는 계획을 내놓았다. 잠수함을 이용해 적 후방에 상륙한 뒤 사막지형과 어둠을 이용해 롬멜사령부로 접근, 습격한 뒤 잠수함을 이용해 탈출한다는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유래가 없는 대담한 작전이었다.
11월에 시행한 작전은 시작부터 꼬였다. 강한 파도로 고무보트가 뒤집혀 해안에 상륙한 병사는 절반인 18명뿐이었다. 그들은 현지에서 우연히 만난 아라비아 유목민의 도움으로 동굴에 은신했다. 공격팀은 둘로 나뉘어 한 팀은 통신선 절단임무를 맡고, 키즈 중령과 5명의 대원이 사령부로 돌입했다. 11월17일 밤 11시 대원들이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복도에서 우연히 독일 장교와 부딪혔고 격투를 벌이다 총소리를 내고 말았다. 특공대는 무작정 공격을 개시해서 건물 안에 있던 병사 몇 명을 사살했지만 이 과정에서 키즈 중령이 전사했다.
건물을 빠져나온 특공대는 독일군의 추적을 따돌리고 다른 팀과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파도가 높아 잠수함이 약속장소에 오지 못했다. 동굴에 은신하던 특공대는 이들을 추격해온 독일군에게 포위됐다. 포위망을 탈출한 생존자들은 내륙을 횡단해 영국군 지역으로 탈출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그러나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고 단 2명이 생환했다. 그들은 한 달 가까이 독일군 지역을 걸어서 생환에 성공했다.
롬멜 습격 작전은 특수전의 효시로 특수부대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첩보전 영역에 가까운 암살 작전을 군인정신과 모험심으로 추진한 게 문제였다. 대원들은 용감하고 강인했지만 이런 작전에 익숙하지 않았던 탓에 작전 시행 중에는 엉성한 모습을 여러 번 보였다. 최악이었던 것은 그 건물이 독일군 사령부가 아닌 보급사령부였다는 점이다. 롬멜은 그곳에 온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사령부를 정확히 알아냈다고 해도 가능성은 희박했다. 롬멜은 전선을 돌아다니느라 사령부에 머무르는 시간이 적었다. 게다가 그날은 본국 방문 중이었다.
박소(Vaagso) 습격작전
1941년 12월26일 거의 대대급의 코만도 병력이 노르웨이의 수도 베르겐 북부 200㎞ 지점에 있는 박소 섬에 기습적으로 상륙했다. 그들의 목표는 닥치는 대로 독일군의 모든 시설을 파괴하고 독일군을 살해하는 것이었다.
6개의 지대로 나뉜 코만도는 박소 섬과 주변 섬의 탄약고, 항구시설을 파괴하고 수비대를 격멸했다. 기습상륙은 성공했고 각 부대는 자신의 목표물을 남김없이 파괴했다. 그러나 독일군 수비대와 전투를 벌이면서 전투가 시가전 양상으로 변하자 코만도의 희생이 늘어갔다. 기습을 허용했지만 독일군은 방어지대를 구축하고 완강하게 저항했다. 시내 중심가로 돌입했던 코만도 2지대는 던포드 중령 외에는 장교들이 거의 전사했다. 초기 코만도는 장교들의 희생이 컸는데 최정예 부대라는 자긍심에 고무돼 과도하게 몸을 드러내며 싸우거나 앞장서서 싸우다가 전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코만도를 수송해 온 해군 구축함은 별도로 항구에 정박 중이던 독일군 수송선 및 호송함과 포격전을 벌여 모조리 파괴했다. 사용불가능 수준으로 파괴하기는 했지만 구축함의 화력이 약해 배들을 완전히 침몰시키지는 못했다.
이 전투는 전형적인 코만도식 습격작전으로 사령부는 이 성과를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별 볼일 없는 창고와 수비대를 격파한 대가치고는 희생이 컸다. 더 큰 비극은 이 작전을 성공이라고 치부한 사령부가 더 크고 정통적인 군사작전에 코만도를 투입한 것이다. 1942년 3월, 프랑스의 요충이자 군사항구인 디에프를 점령하는 디에프 상륙작전은 코만도 10개 부대와 정규군까지 투입한 최대 규모의 군사작전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용감한 병사들이라도 요새화된 항구에 정면으로 돌진하는 건 자살행위였다. 코만도는 수천 명의 피해를 입었고 이 작전은 최대의 참사로 기억됐다.
투지와 돌격정신의 유산
코만도는 들인 노력과 명성에 비해 전과는 미미했다. 훈련은 강했지만 기능적 일관성과 정밀도가 떨어졌다. 아까운 용사들이 무모한 작전에 헛되게 희생됐다. 코만도의 시작부터가 우리도 공격을 해보자는 전시성 명분이었다. 목적과 방법이 불분명한, 감정과 명분에 의지하는 계획이 초래하는 결과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성과가 있었다. 박소 습격은 히틀러로 하여금 연합군의 침공지점이 노르웨이라는 신념을 굳히게 했다. 독일군 30만 명이 노르웨이에 배치됐다. 이 병력의 절반만 노르망디에 있었다고 해도 연합군은 몇 배의 희생을 치러야했을 것이다.
롬멜 습격작전과 디에프 상륙 같은 극단적인 용도를 오가면서 코만도는 이런 특수부대는 소규모 단위의 습격과 적의 레이더 파괴와 같은 목적이 분명한 작전에 투입해야 한다는 교훈을 찾아냈다. 이에 북아프리카에서 10명 정도의 팀이 지프에 기관총을 장착하고 적의 후방기지를 치고 빠지는 SAS 특공대가 조직됐다. 이들의 활약으로 독일 전군에 경계와 순찰이 강화됐고 피로가 증가하고 사기가 저하됐다. 롬멜은 이 작은 부대가 어떤 영국군 공격보다도 큰 피해를 줬다고 회상했다.
코만도의 실패와 성공 사이의 간극을 메꿔 주었던 것은 “앉아서 기다리느니 나가 싸우겠다”는 심정으로 코만도에 뛰어들었던 병사들의 투지와 돌격정신이었다. 그들은 허무하거나 무모한, 혹은 말도 안 되는 작전을 수행하며 전쟁의 역사에 새로운 패턴을 창조해 냈다.
이것이 투지와 돌격정신, 도전정심과 모험심의 진정한 가치다. 오늘날 많은 기업에서 사원들의 투지와 도전정신이 부족하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조직화되고 정밀한 기업일수록 투지와 도전정신을 평가할 지표가 없다는 게 진정한 이유가 아닐까? 성과와 효율성이란 지표로 보면 코만도의 초기 작전은 하나같이 낙제였다. 그러나 그렇기에 이들의 투쟁과 헌신은 더욱 값진 것이었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email protected]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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