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1627년(인조 5년) 1월 조선 정가는 비교적 조용했다. 특별한 정쟁도 없었고, 대동법이나 호포법처럼 논란이 될 만한 정책도 없었다. 군역 도피자를 잡아 내기 위해 전국에 어사를 파견해서 호패를 재정리 한 일이 가장 큰 사건이었다. 당시 조정에서 벌어진 논쟁은 거의가 왕실의 상제에 관한 내용이었다. 굳이 의미를 달자면 나중에 18세기를 뜨겁게 달구는 예송 논쟁의 전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논쟁이 비교적 점잖았다. 그 논쟁의 뒤에 정파 간의 대립이 자리잡고 있기는 했지만, 드러내놓고 당파 간에 싸움을 벌이는 일보다 이렇게 진지하고 학술적인 주제로 논쟁을 벌이는 일이 오히려 점잖고 바람직해 보였을 정도였다.
1월 중순이 되자 인조의 부친인 정원대원군(후에 원종으로 추존)의 천장 문제까지 겹쳐 상제 논쟁의 톤이 조금 높아졌다. 약간의 긴장감이 돌기 시작할 때 후금 군대는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다.
후금 군의 침공이 시작된 때는 1627년 1월 13일이었다. 무전이 없던 시대라 1월 17일이 돼서야 한양 조정에 파발이 도착했다. 그때 벌써 의주는 적의 손에 떨어졌다. 후금 군은 평안북도 곽산의 능한산성을 포위했고, 그들의 선발대는 청천강까지 진출해 있었다. 황급히 인조를 중심으로 대책 회의가 열렸다. 하필 그때 병조판서가 공석이었다. 조선은 즉시 병조판서를 선임하고, 총사령관을 뽑았다. 청천강에서 한양 사이의 전략 거점인 안주, 평양, 임진강의 방어대책을 논의하고, 방어 책임자도 임명했다. 별도로 한양의 방어 대책을 마련하고, 조선 인구의 절반이 살고 있는 중남부 지방에서 병력을 징발할 책임자도 뽑았다.
이 때 갑자기 우찬성 이귀가 패전을 대비해 피난 갈 곳을 정해 놓아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귀는 강화도가 좋다며, 안주에서 패배하면 바로 강화도로 피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조는 “이런 의논은 천천히 하라”고 짜증을 냈다. 그러나 내심 불안했는지 주로 경기도의 병력을 남한산성에 투입하도록 지시했다. 남한산성보다 급한 곳도 많았지만 인조는 이를 무시하고 남한산성이 중남부를 잇는 교통의 요지라는 주장을 했다.
결국 1월 21일 능한산성이 함락됐다. 23일부터 25일 사이에는 안주, 평양, 황해도의 황주가 무너졌다. 침공 12일 만에 후금 군은 압록강에서 임진강까지 도달했다. 다행히(?) 인조는 침공을 보고 받은 지 3일 만인 1월 19일 가망이 없음을 알고 파천을 결심했다. 목적지는 강화도였다. 인조가 강화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던 후금 군이 자진해서 화친을 요구했다. 사실 조선은 후금의 화친 요구가 내심 고마웠다.
후금 사신의 요구사항은 의외로 간단했다.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청나라를 형님으로 모시라는 것이었다. 후금을 세운 만주족(여진족)은 오랜 세월 중국과 부대끼며 살아왔다. 만주족이 강할 때는 중국을 차지하기도 했지만, 약할 때는 매우 지리멸렬해서 한족으로부터 온갖 수모와 모욕을 받았다. 그래서 그런지 만주족은 국제 관계에 대해서는 매우 담담하고 현실적이었다. 자신이 강하면 요구할 만큼 요구하고 자신이 약해지면 강한 자에게 설설 기었다. 그래서 후금은 조선에 이런 요구를 할 때도 그들의 관습대로 비교적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조선은 달랐다. 조선은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생각했다. 조선에게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는 곧 자연과 우주의 질서였다. 양쪽의 입장은 엄청나게 달랐지만 의외로 이때는 적당히 무마되었다.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었던 조선은 어영부영한 답장을 보냈지만, 후금은 조선을 아직 자세히 몰랐고, 조선에 장기 주둔할 형편도 아니었다. 결국 서로 조금씩 양보해서 강화가 성립됐고 3월에 후금 군이 철수했다. 이게 바로 정묘호란이다.
왜군보다 2배 이상 진격 속도가 빨랐던 후금 군
정묘호란은 병자호란에 묻혀 우리 역사에서 거의 거론되지 않는다. 그러나 군사적, 외교사적 관점에서 보면 생각할 거리가 많은 전쟁이 바로 정묘호란이다. 당시 조선을 침공한 후금의 병력은 겨우 3만 명이었다. 그들은 보름이 되기 전에 평안도에서 황해도까지 조선의 전 국토 25%를 유린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날은 4월 13일, 한양을 함락한 날은 5월 2일이었다. 즉 후금 군이 압록강에서 임진강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은 임진왜란 때 일본 군의 진격 속도보다 더 빨랐다. 더욱이 의주에서 황주까지 오는 길에 위치한 곽산, 정주, 안주, 평양과 같은 요새지는 부산-서울 사이의 요새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이를 감안하면 후금 군의 진격 속도는 왜군보다 2배 이상 빠른 셈이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한 걸까.
더 기가 막힌 일은 정묘호란이 임진왜란(1592∼1598)이 끝난 지 불과 30년 밖에 되지 않았을 때 발생했다는 점이다. 임진왜란으로 큰 충격을 받은 조선은 대대적인 군제 개혁을 단행했다. 수천 년간 조선의 장기였던 활을 버리고 총과 대포를 기본 화기로 하는 새로운 군대를 만들었다. 부병제의 한계를 깨닫고 훈련도감과 같은 직업 군인 제도도 만들었다. 임진왜란 당시 수도를 쉽게 포기해서 전국민적인 저항과 원성을 야기했던 기억을 잊지 않고, 남한산성을 쌓았다. 강화도와 개성 등 수도권 주변에 군대를 배치해 수도방어 체제도 강화했다. 조선 군은 그 외에도 많은 노력을 했고, 이 노력은 1627년에도 계속 진행 중이었다.
조선 군이 허무하게 무너진 이유
왜 조선은 이렇듯 허무하게 무너졌을까. 가장 큰 이유는 국제관계를 보는 조선의 경직된 사고다. 조선은 중국과 조선의 사대관계라는 절대적 명분에 집착해서 주변국 상황에 대한 현실 분석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후금이 침공했을 때 조선은 왜 후금이 조선을 침공했는지 그 이유조차 알지 못했다. 대책회의의 첫 번째 논제가 저들이 왜 쳐들어왔느냐는 주제였을 정도로 상황에 무지몽매했다. 대책회의 때 조선 관리들은 후금의 목적이 조선에 대한 침공이냐, 조선에 망명해 있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잡으러 온 것이냐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후금과 명의 관계를 보면 답은 뻔하다. 후금의 목표는 중원 점령이었고, 이를 위해 먼저 배후의 조선을 제압하겠다는 전략을 펼쳤다. 사실 이는 삼국시대부터 계속된 뻔한 구도였는데, 조선은 이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조선은 ‘명나라와의 의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절대 명제를 고수할 방법만 고민하고 있었다. 그 관점에서만 세상을 봤으니 주변국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리 만무했다. 후금 군이 침공할 거라는 생각조차 못했고, 당연히 사전 정보 활동도 없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더 황당한 사실들이 드러났다. 조선은 후금 군의 전술과 능력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다.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조선 군이 후금과 싸운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금에 대한 정보조차 없었다는 사실은 뼈아프다. 특히 사르후 전투에서 조선 군은 후금에 형편없이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를 학습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후금의 능력과 전술을 분석하기는커녕 사령관 강홍립이 광해군의 밀지를 받고 일부러 패했다는둥, 조선 군이 너무 잘 싸워 후금 군이 감동을 했다는둥 진위도 분명하지 않은 사실로 패배를 호도하고 스스로 자기도취에 빠졌다.
전력 분석이 없으니 예상 시나리오도 없었다. 후금의 진격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자 조선 군은 완전히 당황했다. 의주와 평양이 버틸 수 있는 시간, 적절한 방어 거점, 방어에 필요한 병력을 계산할 수가 없었다. 버티는 데 총력을 다할지, 도성을 버리고 피난을 갈지, 버틴다면 어디서 어떻게 버틸지에 대한 준비도 없었고, 의사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사실 조선 군의 방어 시스템은 비교적 제대로 작동했지만, 후금 군의 전술과 공격 속도와 전혀 맞지 않아 효율적이지 못했다. 병력을 필요한 방어 거점에 집결시키지 못하고, 평소의 관습대로 주변의 큰 고을로 소집했다가 후금 군에 의해 각개격파로 무너졌다. 후방에서 오는 군대와 물자는 먼저 어디로 보낼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니 병력을 소집하면 벌써 딴 곳으로 갔다고 하고, 간신히 병력이 도착해도 총포와 화약이 도착하지 않았다. 피난을 결정한 후에도 어디로 갈지, 강화도로 간다면 방어에 필요한 병력이 얼마인지, 군수 물자는 어디서 조달할지에 대한 계획이 전혀 없었다. 한마디로 조선은 후금 군의 능력과 전술을 도외시 한 채 자신들이 편한 대로만 전쟁을 준비했다. 아무리 임진왜란의 교훈을 통해 준비를 했다고 외쳐도 백약이 무효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평도 사건과 정묘호란
북한 군이 연평도를 포격한 이후 서해 5도의 방어 시설이 북한 군에 비해 형편없다는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일고 있다. 한국 군의 방어 시설이 북한 군보다 떨어지는 주된 이유는 한국 군이 적의 상륙 작전에만 대비하고, 포격 작전은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다. 연평도 지역은 북한과 인접한 최일선 지역이다. 이렇게 살아온 지가 50년이 넘었는데도 부실한 대피 시설, 해안포 부족 등이 거듭 지적된다는 자체가 한국 군의 대비가 얼마나 부실한지 잘 보여준다. 한국 군의 훈련이 부족한 것도, 병사들의 피땀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허망한 순간을 맞이해야 하는가. 모든 전쟁이나 경영 현장에서 항상 발생하는 일이지만 상대가 예측하고 있는 대로 싸워주는 적군이나 경쟁 회사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왜 한국 군은 북한 군의 상륙 작전에만 대비를 했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리더들의 리더십 부족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인조는 비교적 괜찮은 군왕이었지만, 반정으로 집권했다는 한계 때문인지 자신의 위치를 늘 불안해했다. 그리고 언제나 남을 믿지 못했다. 평화 시에는 인조의 이런 성격이 큰 문제를 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난에 처하자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인조는 조선의 주력 군을 방어 거점에 차출하는 일을 반대했다. 대신 제일 중요한 병력을 남한산성과 강화도로 빼돌려 자신의 피난길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데 사용했다. 그 바람에 조선 군의 총사령관 장 만은 후금 군이 임진강에 도달할 때까지 군대 없이 전쟁을 지휘해야 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인조가 리더로서의 당당함과 주인의식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주도적으로 국난을 극복해 가는 자세를 보여주지 못했다. 관료들의 주장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지나치게 배려하고, 자신이 큰 소리를 칠 때나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에서 지나치게 정치적 눈치를 살폈다. 오늘날의 리더들도 마찬가지로 이런 면이 부족하다. 진정한 리더는 시대와 상황이 요구하는 역할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전쟁과 같은 비상 상황에서는 더더욱 국가와 국민이 필요로 하는 게 무언인가를 빨리 깨닫고 담대하게 나아갈 필요가 있다.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