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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의 패권지도를 그리는 와튼

윤성원 | 77호 (2011년 3월 Issue 2)
금융위기 이후 경기 부양이라는 절대적 과제를 떠안은 미국은 기축통화의 체면을 포기하다시피 하고 대규모 양적 완화 정책을 단행하고 있다. 이 노력은 최근 실업률 하락 및 소비지표 상승 등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대규모 유동성의 상당 부분이 개발도상국에 흘러들어가 신흥시장의 인플레이션을 부추기고 있다. 이에 미국의 경기 회복을 위해 이머징 국민들이 희생당한다는 비난이 일고 있다. 하지만 이를 일방적으로 비난만 하기도 쉽지 않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대의 소비 시장이기 때문이다. 미국 경제의 회복은 결국 세계 경제, 특히 수출 의존도가 높은 아시아 각국 경제에 긍정적 파급효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반대 축에는 중국이 있다. 작년 10월 시진핑 국가부주석의 취임 이후 중국은 과거 해안도시를 중심으로 한 수출 기반 경제 정책에서 내수 중심의 균형적 성장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낙후된 중서부 지역 개척, 임금 인상, 내수 활성화 등의 경제 구조 개혁 정책을 펴고 있다. 동시에 이러한 정책 변화로 발생된 인플레이션 통제를 위해 금리 인상, 지준율 인상 등 거시 정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이미 중국발 인플레이션은 중국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 중국산 저가 상품을 소비하면서 호황을 영위했던 세계 경제는 이제 중국에서 수출된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물가 상승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양국 경제 정책의 핵심 문제는 바로 환율이다. 미국은 자국의 경기 회복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막대한 대 중국 무역적자를 지목하고 있다. 중국이 인위적으로 위안화 가치를 낮게 유지(위안화 고정환율 제도)하는 바람에 미국 경제의 회복도 늦어지고, 세계 경제 또한 피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중국은 미국이 기축 통화 국가의 책임을 무시하고 무분별하게 유동성을 공급하는 바람에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을 부추기고 있다고 반박한다. 올해 초 와튼에서는 이에 대한 해결 방향을 제시하는 2개의 흥미로운 인터뷰가 있었다.
 
- 아닌 국제사회 차원의 접근 필요
와튼의 국제 경영학 교수인 모로 길런(Mauro Guillen)은 와튼 출판부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의 고정 환율제는 단지 미국 경제에만 악영향을 주는 게 아니라, 다른 나라들의 수출 경쟁력도 악화시켜 세계 경제 구조에 왜곡을 가져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과 중국의 대 일본 수출 품목의 87%가 겹친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중국이 위안화 가치를 낮게 유지하며 자국의 수출 경쟁력을 보전하는 바람에 미국뿐 아니라 다수 국가들의 수출 경쟁력이 의도치 않은 피해를 보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중국에도 좋지 않다고 길런 교수는 주장한다. 눈 앞의 단기 이익 때문에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일에 소홀해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길런 교수는 상황을 중국이 책임져야 한다는 일방적 논리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미국 정부가 재정악화의 대표적 원인으로 중국의 환율 정책만을 비난하는 것은 손쉽게 만든 답안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특히 이 갈등을 풀려면 미국 정부와 중국 정부뿐 아니라 국제 사회, 즉 G7, 중국, 러시아, 인디아 등이 공조해 새로운 체제를 출범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출 중심 성장 체제에서는 고정환율제도가 중국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줬지만 언제까지나 이에 의존할 수는 없다. 내수를 성장 엔진으로 삼아야 할 시점이 점점 다가오고 있기에 중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환율 제도의 점진적 변화는 불가피하다. 국제 사회는 ‘현 제도가 장기적으로는 중국의 이익에도 부합하지 않으며, 중국이 세계 경제의 양대 축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잘 설득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물론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큰 방향에는 공감한다 해도 변화의 시점에 대해서는 각국의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일단 미국 정부는 내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어떤 식으로든 중국 정부를 압박해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한다. 중국 정부 또한 인플레이션 압박, 커져가는 자국 내 민주화 요구, 빈부 격차 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당분간은 현재의 고도 성장 체제를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유럽의 재정위기, 이머징 국가들의 정치적 불안정성 등을 고려하면 두 나라를 제외한 다른 나라가 해결책 모색에 주도적 역할을 하기도 힘들다.
 
중국에 주도권을 부여하라
재무 분야의 석학인 프랭클린 앨런(Franklin Allen) 교수의 시각은 더 흥미로웠다. 그는 중국의 환율 조작 논란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첫 질문에 ‘조작’이라는 표현 자체가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론상으로는 자유경제체제 하에서 정부가 아니라 시장이 환율을 결정해야 하지만, 정부가 환율을 직접적으로 관리하는 일은 수많은 국가들이 사용해 온 전통적 정책이라고 설명했다. 과거 브레튼우즈 체제 출범, 유로 출범 등도 대표적 예라고 덧붙였다. 그는 현 상황을 환율 고정(fixing) 논란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문제 해결을 위한 첫걸음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의 고정환율 구조가 중국에 이득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길런 교수와 비슷한 의견을 보였다. 고정환율 체제가 수출 주도의 고도 성장에는 분명 좋지만, 이런 성장 방식은 과거에만 유효했을 뿐 미래의 중국 경제 구조에는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1998년 경제위기를 겪은 많은 아시아 국가들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로 엄청난 규모의 달러를 외환보유고로 쌓아놓기 시작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작년 말 기준 중국의 외환보유고는 무려 2조 8500억 달러에 달한다. 외환보유고의 대부분은 달러화로 된 미국 국채다. 미국이 세계에서 빚을 가장 많이 진 나라라면, 중국은 이 채권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앨런 교수는 이 현상이 미국과 중국 모두에 시한 폭탄과 다름 없다고 지적한다.
 
중국이 지금처럼 수출로 외환보유고를 늘려나가는 일은 어느 순간에는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이때 중국이 미국 채권을 판매하면, 중국이 보유한 어마어마한 미국 채권의 양을 감안할 때 미국 채권 가치의 급락은 불가피하다. 이는 중국이 보유한 외환 보유고의 가치 하락으로 이어져 중국 경제에도 타격을 입힌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달러 하락 덕에 현재 실제보다 저렴한 가격에 중국 물건을 구매하고 있다. 미국 내수 상품의 경쟁력이 높지 않은 상황을 고려할 때, 중국이 고정환율제도를 폐지하고 물건 값을 제대로 받기 시작하면 미국 소비자들은 지금보다 더 비싼 가격에 물건을 구입해야만 한다. 당연히 미국의 경기 부양은 늦어질 수밖에 없다.
 
앨런 교수는 해결책은 중국의 위안화를 세계의 기축통화로 만드는 일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장기적 시각으로 볼 때 중국이 고정환율제도를 폐지하느냐의 여부는 중국 입장에서도 작은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언제, 어떻게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만드느냐의 문제가 훨씬 중요한 사안이라며 이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국도 당장 중국에 고정환율제 폐지 압박을 가하기보다, 달러 공급량을 줄이고 내수 산업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도 지적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 국민이 고통을 겪더라도 감내해야 한다고 말했다. 환율로 재정적자를 줄이려는 시도는 한계가 있으며 효과도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앨런 교수는 중국의 환율 정책을 바꾸라는 미국과 유럽의 직접적 압박은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지적했다. 흥미롭게도 그 이유를 중국의 역사에서 찾았다. 중국이 인류 역사에서 세계의 중심이 아니었던 시간은 지난 150여 년간에 불과하다. 그 기간 중 구미 열강들에 자존심을 다쳤던 중국에 다시 이런 식으로 압박을 가하면 오히려 중국 측의 변화 의지를 늦출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중국 경제 전문가들 또한 장기적으로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만드는 게 비정상적 외환보유고에 따른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고, 중국 경제의 성장을 가져온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과 유럽은 한 발짝 물러서고,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들에게 이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존심이 유달리 강한 중국인들의 특성상 문제 해결의 주도권을 주면 환율 갈등에 대한 해결책을 스스로 국제 사회에 제안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즉, 길런 교수는 세계 최대 강대국이라는 미국의 입지, 기축통화라는 달러의 역할을 유지한 채 중국을 포함한 국제 사회의 공조를 주장하고 있다. 반면 앨런 교수는 아예 중국에 그 패권을 넘겨줘 중국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효과를 취하면서, 패권을 쥔 만큼 중국 스스로 그 해결책을 찾도록 유도하자는 주장을 펴고 있다.
 
거대한 두 나라가 자국의 경제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지금, 한국이 이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 안타깝기도 하다. 이를 안타까워하기에 앞서, 한국 정부와 기업들이 그 변화의 폭, 정도, 시기에 관해 제대로 예상하고 있는지, 각각의 시나리오에 따른 대비책을 마련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윤성원 펜실베이니아대 와튼 MBA CLASS OF 2011 [email protected]
 
윤성원 씨는 연세대 천문우주과학과를 졸업한 후, 베인&컴퍼니에서 컨설턴트로 근무했다. 금융, M&A, 항공, 산업재 부문의 컨설팅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1881년 필라델피아의 사업가였던 조지프 와튼이 설립한 와튼 스쿨은 세계 최초의 비즈니스 스쿨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세계 유수 언론으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비즈니스 스쿨로 여러 차례 선정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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