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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발상의 CEO 맥아더, 초긴축 전투를 하다

임용한 | 59호 (2010년 6월 Issue 2)
1942년 3월 17일 맥아더는 바닷물에 형편없이 젖은 몰골로 호주에 도착했다. 3월 12일 작은 어뢰정으로 필리핀의 콜레히돌 요새를 탈출해 5일 동안 태평양의 절반을 건너 호주에 당도했다. 그를 위해 미 극동군 사령관 자리가 준비돼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 개인적으로는 참담한 순간이었다. 그는 병사들을 필리핀에 남겨 두고 지휘관인 자신만 홀로 빠져나왔다는 불명예를 안았다. 맥아더가 필리핀을 탈출한 지 두 달 후, 콜레히돌 전투는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배라는 꼬리표와 함께 종결됐다. 필리핀에서 미군과 필리핀군 14만 명이 일본군의 포로가 됐다.
 
평생을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 살아왔고, 자존심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었던 맥아더였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정신적 충격과 자괴감을 이겨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맥아더는 멜버른에 마련된 사무실로 곧바로 출근해 미 극동군 지휘 업무를 시작했다. 당시 그의 내면적 고통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주변 사람들에게 맥아더는 필리핀 패전의 충격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맥아더의 태도는 옳았다. 그 자리에서 포기하고 은퇴한다면 모를까, 절치부심의 자세로 반격해 승리를 얻기 원한다면 냉정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당시 미군에는 1분 1초의 시간도 부족했다. 태평양 전쟁은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전쟁터였다. 유럽 전선을 통째로 들어내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 놓아보더라도, 육지의 크기가 태평양의 절반도 가리지 못한다. 하지만 이 엄청나게 넓은 전장에서 전쟁을 치를 준비는 전혀 돼 있지 않았다. 호주군만 해도 현지에 있는 병력은 2만 명에 불과했다. 전함과 비행기는 고사하고 소총조차 제대로 없었다. 일본군은 호주 북단까지 왔는데, 연합군의 장비와 물자는 모두 미국에서 수송해 와서 호주에서 조립하고, 다시 현지로 발송해야 했다.
 
맥아더의 탁월한 조직 운영 능력
 
맥아더는 우선 군대와 필요한 장비를 마련해 전쟁 준비를 하고, 태평양에서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했다. 이 시스템이란 게 보통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인도 북부의 인팔 전선에 가는 물자가 연필 한 자루라고 할지라도, 미국에서 우선 호주로 발송한 후 호주에서 인도로 갔다. 인도에 물자가 도착하더라도 실제 전선으로까지 수송하는 게 문제였다. 일단 인도에서 철도로 파키스탄으로 가는데, 파키스탄은 협궤라 열차를 바꿔 물자를 실어야 했다. 철도가 끝나면 도로, 도로가 끝나면 다시 인부를 동원하고 나서야 비로소 현지 미군에게 물자가 전달됐다.
 
경영이란 관점에서 볼 때, 당시 맥아더는 다국적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되어 역사상 유래 없는 세계 최대의 영업망을 구축해야 하는 임무를 맡은 격이었다. 1940년대 당시엔 제 아무리 세계적인 기업이라 할지라도 전 세계에 걸쳐 영업망을 갖춘 다국적 기업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더욱이 이렇게 크고, 복잡하고, 수많은 인종을 포괄하며 연필부터 항공모함까지 세상에 있는 모든 물품을 다 취급해야 하는 회사는 아마 지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초를 다투는 긴박한 상황에서 단기간에 이 임무를 완수해냈다. 나중에 일본군은 최후의 순간, 즉 호주 침공을 앞두고 꾸물거렸다는 비판을 듣는다. 하지만 그들은 미군이 이토록 빨리 군대를 정비하고 반격해 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여기에 더해 CEO 맥아더에게는 또 하나의 난제가 떨어졌다. 이런 엄청난 전쟁터를 초긴축 재정으로 꾸려나가야 했다. 천하의 미국도 유럽과 태평양 2개의 전장을 동시에 지원하기에는 힘에 부쳤다. 그래서 유럽에 물자를 집중 지원하고, 유럽 전쟁을 끝낼 동안 태평양은 어떻게든 버텨보자는 전략을 이용했다. 이렇게 한쪽에 몰아주는 방식은 전쟁에서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가 심했다.
 
맥아더에게 배달된 물자는 유럽 전선의 겨우 5%에 불과했다. 태평양 전쟁을 얘기할 때 우리는 칼과 악으로 버티는 일본군과 미군의 물량공세를 대비시키는 데 익숙해져 있다. 특히 상륙작전 때 미군의 사전 포격은 대단했다. 보통 전함이 함포사격만 몇 시간을 해대고, 그게 끝나면 전투기들이 날아와 다시 1시간 정도 폭격을 했다. 작은 섬이라면 통째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덕분에 미군이라고 하면 ‘흥청망청’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져버렸다. 하지만 이렇게 무시무시한 미군의 물량작전도 사실은 맥아더 사령부가 유럽 전선의 5%의 자본만을 가지고, 초긴축·초합리 경영으로 이루어낸 성과였다.
 
맥아더가 태평양 전쟁의 영웅이라는 점은 누구나 알지만 정작 그의 공로와 능력이 무엇인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가 사령관이라고 하면 전략, 전술 분야만을 생각하고, 사령관이 경영자의 기능도 함께 지닌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태평양 전쟁에서 맥아더의 승리는, 절반은 조직 운영 능력과 경영능력의 승리였다.
 
맥아더의 기행(奇行)은 열정의 발로
경영자로서 맥아더는 비범한 지성과 재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어떤 보고서든지 한번 쓱 훑어보기만 해도, 구석에 씌어있는 문구까지 정확히 기억했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비범한 기억력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지능과 암기력만으로는 절대로 맥아더와 같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비범한 기억력의 근본 비결은 조직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과 관심, 그리고 지식이다.
 
맥아더의 기행, 특히 최고 사령관이 총알이 날아다니는 최전선까지 나가 서성대는 기벽은 유명한 일화를 많이 남겼다. 레이테 섬에서는 해안 교두보도 아직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상륙정을 타고 해안에 내려갔다. 한 중위가 너무나 놀란 나머지, 무례하게 4성 장군인 맥아더의 팔을 잡아끌었다. 장군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비행장까지 가서 미군 전초병을 지나 앞으로 나갔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활주로의 상태를 봐야겠다는 게 이유였다. 그 활주로를 가운데 두고 양군이 대치 중이었는데, 활주로 건너편에 최소한 800명의 일본군이 있었다. 맥아더는 활주로를 발로 확인하면서 그 앞을 걸어다녔다. 그것도 노란색 레인코트를 입은 채로 말이다. 한 미군 병사는 일본군이 맥아더를 왜 쏘지 않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레이테에 있었던 일본군 대령은 맥아더가 그 섬에 왔다는 말을 종전 때까지도 믿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날 밤 일본 전투기들이 레이테 해에 정박한 미군 함정을 공습했다. 그들은 맥아더를 잡기 위해 맥아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순양함을 집중 공격했다(해군은 맥아더가 순양함에서 상륙작전을 참관하는 것도 반대했었다). 그때 맥아더는 해변의 그물침대에 누워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수행원들은 함정에서 전투기의 공격을 받는 것과 아직도 해변에서 날아오는 저격병의 총알 중 어느 것이 더 위험할까를 두고 계속 고민해야 했다.
 
맥아더의 이런 행동에 대해 황당하다는 해석부터 18세기 전쟁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행동이라든가, 카리스마와 자기 과시에 목숨도 아끼지 않는 고약한 성격이라는 등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전쟁과 군, 병사들의 심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파악하고, 감각을 잃지 않으려는 그의 열정과 노력의 일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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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email protected]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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