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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 변화 불러오는 ‘넛지’의 유혹

정재승 | 33호 (2009년 5월 Issue 2)
미국 실리콘 밸리에서 한 벤처회사의 기술 개발을 총괄하고 있는 최고기술책임자(CTO) 한 분을 얼마 전 식사 자리에서 만났다. 그는 자신이 한국의 가전회사에서 근무할 때의 경험을 샤브샤브 향기에 실어 우리에게 들려줬다.
 
그가 가전제품 개발에 참여하고 있던 시절, 어떤 가전제품이 많이 팔리는지를 조사해보니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알 수 있었다. 가전제품이 많이 팔리기 위해서는 좋은 성능의 제품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백화점 진열대 중 높은 곳에 위치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쇼핑하는 고객들의 눈높이가 생각보다 높아서 진열대 위쪽에 놓인 제품들이 팔릴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들은 다양한 제품을 쌓아놓고 팔고 있다. 그러다 보니 비디오 플레이어는 여러 제품들을 포개어 쌓아놓아, 자신들의 제품이 맨 위에 놓이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것도 알게 됐다.
 
묘안이 없을까? 그는 아이디어를 하나 냈다. 비디오 플레이어의 위 커버를 둥그렇고 볼록하게 만들어 그 위에 다른 제품을 올려놓을 수 없도록 한 것이다. 그러면 자신들의 제품이 항상 맨 위에 놓이게 될 테니까. 그 결과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서 비디오 플레이어를 쌓아놓고 팔 때 자신들의 제품이 맨 위에 놓이게 됐고, 매출액은 무려 2배 가까이 늘어났다. 성능은 하나도 바뀐 게 없는데 말이다.
 
이처럼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을 최근 행동경제학에서는 ‘넛지(nudge)’라고 부른다. 이 개념이 지난해 미국 사회를 강타했다. 원래 ‘넛지’는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미국 시카고 경영대학원의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탈러 교수와 하버드 로스쿨 캐스 선스타인 교수가 <넛지>(리더스북, 2009)라는 저서를 펴내면서 새로운 개념이 더해졌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어떤 선택을 금지하도록 하거나, 경제적 인센티브를 크게 바꾸지 않고도 예상할 수 있는 방향으로 그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를 ‘넛지’로 새롭게 정의하고, 그 중요성을 역설했다.
 
넛지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례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스키폴 국제공항의 남자 화장실 소변기다. 이곳 소변기에는 중앙에 파리 모양의 스티커가 붙어 있다. 남자들은 소변을 볼 때 자연스레 소변기 중앙에 있는 파리 모양 스티커를 맞추려고 노력한다. 그 결과 소변기 밖으로 튀는 소변의 양이 파리 그림을 붙이기 전보다 80%나 줄어든다는 게 그 설명이다.
 
‘한발 다가오세요’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같은 표어를 붙이거나 캠페인을 벌이는 것보다, 이처럼 사람의 심리를 이용해 적절한 선택을 유도하는 것을 ‘넛지’라고 부른다. 넛지를 잘 활용하면 명령이나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사람들의 선택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명령이나 인센티브를 이용하지 않고 사람들의 선택에 부드럽게 간섭하지만, 여전히 개인에게 선택의 자유가 열려 있어 ‘자유주의적 간섭주의’로 부르기도 한다. 소변기에 파리 그림을 붙이는 것은 넛지지만, ‘파리 그림을 맞추시오’라고 써 붙이는 것은 넛지가 아니라는 얘기다.
 
부드러운 개입의 위력
탈러 교수 등은 인간이 결코 합리적 동물이 아니라는 데에서 ‘넛지의 필요성’을 찾는다. 인간이 매우 합리적인 동물이라면 합리적인 정책과 우수한 제품을 그 자체로 선택하겠지만, 인간은 결코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선택을 도와줄 장치가 필요하다(그동안 이 칼럼에서 보셨듯이,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합리적으로 판단한다고 생각하지만, 편견이나 인지 오류 때문에 종종 부적절한 결정을 내린다). 게다가 그것이 강압적이거나 타인에 의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넛지처럼 부드럽게 개입하는 개선책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선거일 바로 전날에 투표할 의향이 있는지를 물어보면 투표율이 무려 25%나 올라간다. 게다가 이번 선거는 예년에 비해 투표율이 올라갈 것이라는 뉴스가 나오면 실제로 투표율이 오른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이것을 자동차나 휴대전화 등 특정 제품의 구매 의사를 높이는 데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연구한 과학자들이 있다. 전국 각지에서 4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표본으로 뽑아 조사한 결과, “향후 6개월 안에 새 차를 구매할 의사가 있습니까?”라는 간단한 질문만으로도 구매율을 35%나 높일 수 있다고 한다.

넛지는 이렇게 비즈니스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공공 정책이나 세계 경제 시스템에도 적용될 수 있어 중요하다. 실제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이 개념에 관심을 보였다. 저자 중 한 사람은 지금 오바마 정부의 규제정보국에서 일하고 있다. 특정한 정책이나 방침이 보다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되면, 민간 기업이나 공공 부문 관리자들이 넛지를 활용해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현명한 선택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러니 최대한 비용을 덜 들여 경제적 인센티브를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어떻게 넛지를 설계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넛지를 가할 수 있는, 이른바 ‘선택 설계자’의 범위를 공공의 영역으로 넓히는 일이 각별히 중요하다.
 
탈러 교수는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세계 경제 위기를 몰고 온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에도 넛지를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몇 가지를 개선함으로써 최악의 사태에 이를 확률을 크게 낮출 수 있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차용자들이 모기지를 쉽게 찾고 판단할 수 있도록 모기지의 종류를 대폭 줄인다든지, 대출 견적서에도 유효 기간을 두어 운영하면 사람들이 대출을 적게 받고, 설사 받더라도 빨리 갚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또 오바마 대통령이 개혁을 시도하고 있는 신용카드 제도에도 넛지를 적용해볼 수 있다. 탈러 교수는 신용카드 회사들이 매년 인쇄물과 온라인을 통해 ‘1년 동안 발생한 모든 요금’을 목록으로 만들어 합산한 명세서를 발송하도록 규정하는 제도를 제안했다. 신용카드 사용자들이 카드를 쓰면서 물어야 하는 비용을 정확히 알게 되면, 결과적으로 나중에 크게 손해 보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이렇게 세심한 장치 하나가 구매나 사용법 같은 중요한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상대방에게 강압적으로 선택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 자연스레 합리적인 선택을 유도하는 방법, 이것이 개인이나 기업, 정부 모두가 앞으로 신경 써야 할 일이다. 그런 점에서 ‘넛지’는 우리가 오랫동안 주목할 만한 ‘대뇌 인지적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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