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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금과 통상 문제

정부 보조금, 그 치명적 유혹

안덕근 | 32호 (2009년 5월 Issue 1)
서브프라임 사태가 촉발한 세계 금융위기가 심각한 실물경기 침체를 불러왔다. 각국 정부는 구제금융 조치와 더불어 산업 지원책 마련에도 부산하다. 미국 재무부는 지난해 12월 제너럴모터스(GM)와 크라이슬러의 파산을 막기 위해 174억 달러의 긴급 자금을 투입했다. 게다가 미국 의회는 8190억 달러의 구제금융 법안을 마련하며 국산품 매입 우선 조항까지 만들었다. 공공 사업에는 미국산 철강 제품만 쓰도록 하는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조항이다.
 
애초에는 미국의 보호무역 조치와 자동차 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에 거세게 반발하던 유럽과 일본도 잇따라 비슷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영국 정부는 최근 23억 파운드에 달하는 자동차 산업 지원책을 내놓았다. 앞서 프랑스는 10억 유로의 신차 구입 장려금을 지급하기로 했고, 추가로 60억 유로에 이르는 자금을 긴급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독일은 GM 산하 회사인 오펠의 자금 융통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 보증을 검토하고 있다.
 
자동차뿐만이 아니다. 반도체 시장의 불황이 확산되자 일본, 대만, 독일 등에서는 자국 반도체 업체에 대한 정부 지원을 검토하고 있다. 특히 대만 정부는 메모리 반도체 회사를 위해 약 60억 달러를 지원키로 했다. 누가 자국 산업에 더 많은 보조금을 뿌리는지 내기라도 하는 형국이다.
 
급격한 침체에 빠진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정부가 발 벗고 나서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하지만 경쟁력 없는 산업과 기업에 과도한 보조금을 지원하면 경제의 비효율성만 커지고, 중장기적 경기 회복력만 떨어진다. 더욱 직접적인 문제는 보조금을 둘러싼 무역 마찰이 수출 시장에 큰 혼란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보조금으로 인해 무역 마찰이 생기면 글로벌 소싱과 수출 시장의 안정적 확보가 어려워진다. 사업 자체가 보조금 기반으로 이뤄지면 불시에 사업이 중단될 수도 있다. ‘하늘을 나는 궁전’으로 유명한 초대형 여객기 A380을 개발한 에어버스는 자사에 대한 유럽연합(EU)의 보조금 지급을 둘러싸고 미국의 경쟁사 보잉과 몇 년째 상호 제소를 거듭하고 있다. 보잉이 세계무역기구(WTO)에 EU의 항공기 보조금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EU 지원을 끊어 에어버스의 사업을 중단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WTO 설립 후 국제 통상 규범이 가장 엄격해진 분야가 바로 보조금이다. 2009년 1월 말까지 WTO에 제기된 총 390건의 제소 중 83건이 보조금이나 상계관세 문제다. 약 20개의 개별 WTO 협정 중 보조금 협정은 가장 빈번한 통상 분쟁 대상이기도 하다.
 
한국 기업, 보조금에 왜 구조적으로 취약한가
1995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루커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경제 개발을 원하는 개발도상국에 한국을 본받으라고 하는 말은 농구 잘하는 법을 묻는 농구 선수에게 마이클 조던처럼 하면 된다고 조언하는 일과 같다”고 언급한 바 있다. 루커스 교수의 말처럼 한국은 전 세계가 놀랄 만한 기적 같은 경제 성장을 이뤄냈다. 그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보조금 정책으로 어느 국가보다 능숙하게 자국 산업과 기업을 지원하는 노하우를 키웠다. 한편 항상 규제 철폐를 주장하는 한국 기업들도 사실 다른 국가 기업들보다 정부 보조금에 길들여져 있다.
 
이 때문에 한국 기업과 정부는 WTO 체제 보조금 규범에 구조적으로 취약하다. 게다가 한국 정부가 흔히 벤치마킹하는 EU가 WTO 보조금 협정 차원에서는 최대의 문제국이다. EU는 설탕 산업에 대한 막대한 보조금을 비롯해 농업, 조선, 자동차, 철강, 전자 등 각 산업 부문에서 보조금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보고 배워야 할 대상이 가장 말썽꾼이라는 현실이 한국 정부의 보조금 정책에 혼란을 가져오는 원인이다.
 
비(非)시장경제 국가의 정부 보조금은 불가피하다고 여기던 미국 정부가 최근 국내 법규를 바꾸고 중국에 상계관세를 부과한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즉 중국을 활용한 국내 수출 기업은 기존의 반덤핑관세 문제에다 상계관세 부과 위험까지 걱정해야 한다. 반덤핑관세와 상계관세의 중복 부과가 빈번한 미국에 수출을 많이 하는 기업은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최근에는 세제 감면, 지급 보증 등 직접적인 지원보다 구조조정, 연구개발(R&D)을 통한 간접 지원이 늘어나면서 지원받는 기업이 문제의 심각성을 파악하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구조조정과 보조금 규범
1999년 김대중 정부는 빅딜 정책의 일환으로 현대전자와 LG반도체를 합병, 하이닉스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유동성 위기에 빠진 하이닉스는 합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파산 직전에 몰렸다. 당시 산업은행, 기업은행, 제일은행, 씨티은행 등 10개 은행으로 이뤄진 채권단은 기업 평가 분석을 통해 하이닉스의 존속 가치가 청산 가치보다 크다고 결정했다.
 
이에 따라 채권단은 2000년 12월 8000억 원의 신디케이트 론을 시작으로 2001년 회사채 신속 인수, 전환사채(CB) 인수, 대출 만기 연장, 채무 출자 전환, 채무 면제 등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이는 해외 수출 시장에서 커다란 문제를 일으켰다. 하이닉스의 주요 경쟁업체들이 있는 미국, 일본, 유럽 정부가 고율의 상계관세를 부과해 하이닉스 반도체의 수입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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