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男과 女, 쇼핑호르몬도 다르다

정재승 | 30호 (2009년 4월 Issue 1)
미국인들 사이에 잘 알려진, 남녀의 쇼핑 차이에 관한 유머가 하나 있다. ‘남자는 꼭 필요한 1달러짜리 물건을 2달러에 사오고, 여성은 별로 필요하지 않은 2달러짜리 물건을 1달러에 사온다’는 이야기다. 언젠가 유럽 친구에게 비슷한 얘기를 해줬더니, 독일에도 비슷한 유머가 있다고 한다. 아마도 전 지구적 현상인 모양이다.
 
과학자들 중에는 쇼핑할 때 남녀의 차이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 따르면, 백화점에서 청바지를 사려는 고객의 행동 패턴은 남녀가 전혀 다르다. 여성은 대개 백화점의 청바지 매장을 다 돌아보고, 한 매장 안에서도 모든 종류의 청바지들을 다 훑어본다. 마음에 드는 옷은 반드시 입어보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사지는 않는다. 그것도 부족해 백화점 근처에 있는 청바지 가게나 근처 다른 백화점을 둘러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반나절을 둘러본 결과, 마음에 드는 ‘구입 후보’ 청바지는 3, 4개로 압축된다. 친구와 근처 분식집에서 김밥과 떡볶이를 먹으며 어떤 청바지를 사는 게 가장 좋을지 상의한 후, 다시 매장을 찾아가 한 번씩 더 입어본 뒤에 최종 결정을 내린다. 여성들은 정말 쇼핑 자체를 즐긴다.
 
남자는 어떤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백화점 3층 혹은 4층의 남성 코너로 곧바로 올라간 후, 평소 자주 들르는 브랜드 매장에 가서 “32-36 주세요”라고 말하고는 대개 입어보지도 않고 산다. 세일이면 좋지만, 백화점 세일을 챙겨가며 쇼핑하는 남성은 드물다. 평소 몸이 좀 불었다고 느껴지면 피팅룸에서 입어보는 정도가 남성이 옷을 구입하기 위해 들이는 최고의 노력이다.
 
반면 자동차를 사는 남녀 고객들의 행동은 청바지를 구입할 때와는 정반대다. 여성은 대개 자동차 대리점에 가서 평소 눈여겨봐뒀던 모델을 살핀다. 상세 정보와 가격 정보가 적혀 있는 브로셔를 들고 와 고민하다가 결정한다. 그들이 쉽게 결정을 내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여성에게는 대개 가격과 디자인, 색상이 가장 중요한 고려 요인이다.
 
남성에게 자동차는 이동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들은 자동차를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자동차의 엔진 성능, 안정성, 연비 등이 중요한 요소다. 그래서 남성은 반드시 ‘시승’을 거친다. 외제차라면 2, 3일 차를 빌려 시승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지 않더라도 영업사원과 함께 주위를 돌아보는 정도의 시승을 한다. 많은 남성들은 시승을 포함해 자동차를 구입하는 과정 자체를 즐긴다. 입어보지도 않고 청바지를 사는 남성을 여성이 이해하지 못하듯, 시승 한 번 하지 않고 차를 구입하는 여성을 남성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남자들이 자동차의 디자인이나 색상을 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자동차의 디자인과 색상은 자신감이나 품위의 표현이다. 젊은 남성들이 미끈하고 잘빠진(그래서 자신감이 묻어나는) 디자인과 색상을 더 좋아한다면, 중년 남성들은 높은 사회적 지위를 연상시키는 품위 있는 디자인과 색상을 선호한다.
 
일례로, 독일 벤츠사가 다양한 연령대와 사회적 지위 등을 가진 잠재적 고객들에게 자사의 모델들을 보여주며 뇌 영상을 촬영해봤다. 그 결과 젊고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은 야심가들은 세단보다 스포츠카를 바라볼 때 쾌락 중추가 활성화됐다(이런 신경 영상적인 접근은 모델에 따라 어떤 고객층을 타깃으로 하며, 영업 콘셉트는 무엇으로 잡을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실제로, 스포츠카로 유명한 자동차 브랜드 ‘포르셰’의 구입자들은 90%가 남성이다.
 
이와 달리, 여성은 자동차를 자신보다는 애완동물과 동일시하거나 친구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종종 자신의 애마인 자동차에게 이름을 붙여준다. 남성의 차는 자신과 동일시되므로 따로 이름이 필요 없다. 하지만 여성의 차는 친구이므로 이름을 붙여주는 행위를 통해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런 차이들은 뇌의 구조와 기능 때문만은 아니다. 남녀의 몸에는 서로 다른 호르몬이 강력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바로 에스트로겐과 테스토스테론이다. 에스트로겐은 여성호르몬의 일종으로, 남성의 몸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의 성적 특징들을 유발한다. 세심하고 감성적이며 인간관계에 민감한 성향은 이 호르몬 때문에 생긴다.
 
테스토스테론은 남성의 몸에 흐르면서 남성성을 만들어낸다. 남성이 여성에 비해 대체로 좀더 공격적이고, 심지어는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것도 테스토스테론의 과도한 영향 때문이다. 원시시대에 사냥을 하던 습성을 만들어낸 테스토스테론은 쇼핑을 할 때도 사냥과 마찬가지로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돌진하게 만든다. 청바지를 사고자 하면 청바지 매장으로 직행하게 되는 것은 테스토스토론의 효과라는 얘기다.
 
호르몬에 의한 남녀 차이는 백화점에서 물건을 바라보는 방식에도 나타난다. 남성은 한곳만 쭉 보는 ‘터널 시야’를 갖고 있는 반면, 여성은 여기저기 둘러보는 ‘서클 시야’를 갖고 있다. 그래서 여성들은 살 만한 물건을 놓쳐서 못 사는 일이 별로 없다.
 
이런 쇼핑의 성차를 만들어내는 곳은 섭식 행동이나 성행위를 관장하는 시상하부(hypothalamus)다. 이 안의 신경세포들은 대개 여성보다 남성의 뇌에 2배 이상 많다. 그래서 남성은 시상하부 앞부분이 좀더 크다. 태아 때 남성호르몬이 대뇌에 작용해 시상하부를 더 크게 만드는데, 그 효과가 이런 성차로 나타난다. 물론 어린 시절보다 어른이 되었을 때 그 효과는 점점 더 커진다. 그렇다면 이를 마케팅에 어떻게 적용해볼 수 있을까? 다음 호에서 좀더 깊이 논의해보자.
 
편집자주 비즈니스에서 성공하려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의식구조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과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정재승 교수가 인간의 뇌에 대한 최신 연구 성과 및 경제적 의미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인간 심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만나보기 바랍니다.
 
필자는 KAIST 물리학과에서 학부, 석사, 박사 과정을 마쳤다. 미국 예일대 의대 정신과 연구원, 고려대 물리학과 연구교수를 거쳐 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정재승의 과학콘서트> <도전, 무한지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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