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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1. 실리콘밸리의 채용 현장

“열심히 일하면 내 몸값이 치솟는 곳
유연한 고용시장이 혁신 생태계 만들어”

유호현 | 279호 (2019년 8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1.위계 조직에서 바라는 최고의 인재상
: 눈치 빠르고, 똑똑하고, 말 잘 듣고, 조직에 적응을 잘하는 사람
2.역할 조직에서 바라는 최고의 인재상
: 주어진 미션에 대해 정보를 모아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자신의 전문성을 더해 최고의 성과를 내는 사람
3.실리콘밸리 기업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특징
: 스스로 동기부여가 된 ‘프로페셔널’로, 회사에서 잘릴까 두려워 일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꿈과 야망을 위해 전문성을 쌓고 최고의 성과를 창출하기 위해 전념




채용이 열어준 세상

2012년 미국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중 전문가들의 소셜네트워크인 링크트인을 통해 채용 담당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트위터에서 인사합니다(Hello! From Twitter)”라는 제목을 단 e메일의 내용은 나와 면접을 보고 싶다는 것. 실리콘밸리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이 그리 많진 않았지만 한참 인기를 끌며 급속도로 성장해 나가던 스타트업으로부터 온 연락이었던지라 호기심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트위터의 채용 과정은 내 예상과 사뭇 달랐다. 채용 담당자와 통화를 한 후 두 차례에 걸쳐 기술 전화 인터뷰를 봤다. 인터넷 공유 문서를 켜놓고 전화로 설명을 하면서 실제로 코딩을 해보라는 주문이었다. 이를 통과하고 나니 비행기표와 호텔 투숙권을 보내줬다. 내가 공부하던 텍사스 오스틴에서 트위터 본사가 위치한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로 날아오라는 뜻이었다. 낯선 도시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현장(on-site) 인터뷰를 보러 갔다. 정장 대신 검은 스웨터와 청바지 차림으로 갔지만 상당히 위화감이 들었다. 뭔가 어색하게 깔끔하게 차려입은 느낌이랄까. 트위터 직원들의 모습을 흘끗 살펴보니 정말 대충 티셔츠 정도나 걸치고 다니는 듯했다.

현장 인터뷰는 하루 종일 여섯 명의 면접관이 한 시간씩 들어와 내게 문제를 주면서 내가 진짜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아는 사람인가를 테스트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한국인답게 예의 바르고 성실하게 문제를 풀었다. 그런 자세가 좋은 인상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입사 후 우연히 전해 들은 바로는 나의 성실했던 태도가 트위터가 견지하는 열린 문화에 섞이지 못할 것이라는 인상을 줬다고 한다.

총 여섯 시간 동안 면접을 보고 나니 내 모든 실력이 바닥까지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면접을 보기 전까지는 박사 과정을 그만두면서까지 트위터에 입사할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인터뷰를 모두 마친 후엔 들인 시간과 고생이 억울해서라도 꼭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면접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도 좋았고, 회사에서 제공하는 세 끼 식사도 맛있었다. 가난한 대학원생 입장에선 맛있는 음식을 매일 먹을 수 있다는 사실도 소소한 매력이었다.

트위터에 입사하던 첫날, ‘이렇게 고생해서 좋은 회사에 들어왔으니 잘리지 말고 오래오래, 최소한 20년은 다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만 해도 실리콘밸리의 평균 근속 기간이 2년도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렇게 좋은 회사에 어렵게 들어와서 왜 제 발로 나간다는 말인가? 그런데 몇 달을 지내고 보니 정말 많은 사람이 스스로 회사를 그만뒀다. 회사에 크게 불만이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저 더 좋은 기회를 찾아서 나가고 있었다. 입사한 지 3년쯤 지나자 내가 입사했을 당시 만났던 사람들의 절반이 트위터를 떠나고 없었다. ‘이렇게 좋은 회사를 두고 떠나다니…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이렇게 없어도 되는 걸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물론 트위터에서 경력이 쌓이면서 내게도 또다시 링크트인을 통해 채용 관련 제의가 들어 왔다. 개중에는 스타트업들도 많았고 구글, 페이스북 같은 큰 회사도 있었다. 제안이 너무 많이 와서 일일이 답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엄청난 슈퍼스타 엔지니어도 아닌데도, 단지 내가 트위터에서 일하고 있다는 이력만 보고 수많은 회사에서 연락을 해 온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끝까지 트위터에 남겠다. 내 인생에 실리콘밸리에 입성하는 길을 열어주고 미국 비자 문제까지 해결해 준 회사와의 의리를 지키리라’고 다짐했다.


채용이 바꿔준 세상

그러던 어느 날 에어비앤비 채용 담당자에게 연락이 왔다. 트위터를 떠날 생각은 없었지만 한편으론 새로 부상한 회사인 에어비앤비가 궁금했다. 일단 무슨 말을 하는지나 들어보자는 심정으로 에어비앤비를 방문했다. 마침 에어비앤비는 트위터 본사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트위터에선 근태관리를 따로 하지 않았다. 따라서 평일 근무시간에 캘린더를 ‘바쁨’으로 설정해 놓고 짬을 내서 다녀올 수 있었다.

실제 회사를 방문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니 에어비앤비는 트위터보다 더 새롭고 재미있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웃는 표정이었고 회사 전체에 생기가 돌았다. 투명한 천장에서 내려오는 빛은 기분을 활기차고 따뜻하게 만들어 줬다. 결국 에어비앤비가 제시한 새로운 기회에 매료돼 면접을 보기로 했다. 트위터 면접 때와 동일하게 전화 면접과 현장 인터뷰를 본 후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연봉도 트위터에서 받던 것에 비해 50%나 더 올려주겠다고 했다.

트위터의 매니저에게 “에어비앤비에서 입사 제안을 받았다”고 하자 매니저는 처음엔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네 미래를 위해 최고의 선택을 하기를 바란다. 어떤 결정을 해도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매니저는 나를 위해 좋은 추천서를 써 줬다. 나는 이것이 정말 매니저가 착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좋은 사람이었지만 단순히 착해서 그렇다는 생각은 일종의 착각이었다. 돌이켜보면 회사를 옮기는 직장 동료에게 솔직하고 우호적인 추천서를 써 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실리콘밸리란 생태계를 살아가면서 언제 또 만나게 될지 모르는 인연이기 때문이다. 당시 에어비앤비는 트위터보다 나를 더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회사가 제시하는 연봉도 올라가는 건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처럼 적극적인 채용 과정을 통해 나는 나와 더 잘 맞는 회사를 찾을 수 있었고, 회사 역시 적재적소에 필요한 인재를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트위터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아마 덜 신났을 것 같다. 트위터가 안 좋은 회사여서가 아니다. 내가 에어비앤비와 조금 더 잘 맞아서다. 트위터 입장에서도 나보다 회사를 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기회가 생겼으니 내가 어느 정도는 긍정적인 기여를 한 셈 같았다.

독자 여러분들이 눈치챘겠지만 지금 이러한 사고방식은 내가 처음 트위터에 입사했을 당시의 가치관과 180도 달라졌다. 더 이상 내 마음속엔 ‘이 회사에 뼈를 묻겠다’는 생각은 없다. 대신 나를 필요로 하는 회사를 적극적으로 찾고 있다. 지금 내 머릿속엔 ‘에어비앤비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있게 될까?’ ‘내 나이가 지금 마흔이니, 코딩과 엔지니어링을 잘해봐야 15년 정도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최신 기술을 계속 습득해 몸값을 최대한 올려 지금보다 더 많이 연봉을 받을 수 있는 직장으로 옮길 수 있는 기회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했다고 전성기의 실력을 갖췄을 때 최대한 내 몸값을 높이는 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직원’은 ‘프로페셔널’의 다른 말

사실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회사를 떠날 생각을 하는 직원들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이기적인 직원’으로 여겨진다. 회사에 충성하기보다 자신의 커리어만 생각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평가는 특히 제조업 중심의 수출 주도 성장 전략에 익숙한 우리나라 경영자들에게서 두드러진다. 이들은 두 가지 큰 전제하에서 직원들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첫째, 직원들은 일을 최소한으로 하고 싶어 한다. 둘째, 직원들은 요구한 만큼의 품질만 만들어낸다. 따라서 더 많은 성과를 내고 더 좋은 품질을 얻으려면 직원들을 더 쪼아 대야 한다.

실제로 제조업이 경제 성장을 견인하던 시절엔 이런 접근이 효과적이었다. 낮은 임금과 긴 노동 시간,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핵심 역량이 되는 제조업에서는 업무 분장과 직원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 제조업의 생산 라인에서는 직원들이 동시에 일을 시작하고 동시에 일을 끝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가 원하는 인재는 당연히 ‘눈치 빠르고, 똑똑하고, 말 잘 듣고, 조직에 적응을 잘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들이 최대한 시간을 다른 데 쓰지 않고 회사 일에 집중하도록 잘 관리하는 것이 기업과 중간관리자의 역할이다. 개인의 개성은 철저히 제한되며 획일화될 것을 요구받는다. 심지어 점심시간마저 전 직원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한다. 모두가 같은 언어,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야 효율이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조업 사고방식의 조직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는 사업체를 시작한 기업의 대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욱이 이런 회사의 대표는 정보를 독점하고 있고, 회사 내 그 누구도 대표보다 더 나은 결정을 내리기 힘든 경우가 많다. 모든 의사결정은 위계에 따라 분배된다. 위계가 높은 사람은 많은 결정권을, 위계가 낮은 사람은 적은 결정권을 갖는다. 당연히 접근할 수 있는 정보도 위계에 따라 제한된다. 이 같은 위계 조직에서 정보는 곧 권력이고 결정권의 크기다. 아랫사람은 결정 권한이 적기 때문에 정보의 양도 상대적으로 적다. 윗선의 경영 정보를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 자신도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굳이 남에게 알려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세상이 달라졌다. 지금은 위계에 따라 의사결정 권한이 분배되는 시대가 아니라 조직 안에서 각각의 역할을 맡은 사람이 결정권을 갖는 시대다. 이른바 ‘위계 조직’에서 ‘역할 조직’으로 기업 구조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것. 가령, 디자이너가 예쁜 핸드폰을 디자인했는데 회사 대표가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고 가정해 보자. 위계조직이라면 그 제품은 시장에 나갈 수 없다. 대표가 최종 결정권자이기 때문이다. 역할 조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표의 의견은 디자인 비전문가인 경영 전문가의 의견일 뿐이다. 참고는 하겠지만 최종 결정은 디자이너가 한다. 당연히 그 제품에 대한 책임은 디자이너가 져야 한다.



소프트웨어 개발 과정에서 A와 B 둘 중 무엇을 먼저 개발할까 고민하는 엔지니어의 경우도 비슷하다. 위계 조직에서는 팀장이 둘 중 하나를 결정할 것이다. 팀장이 판단이 서지 않으면 더 윗선에서 결정할 것이다. 반면 역할 조직에서 팀장은 왜 A 혹은 B를 먼저 개발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할 것이다. 윗선에 물어봐도 자신의 의견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 결정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최종 결정은 엔지니어 본인이 책임을 지고 내려야 한다. 이때의 결정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아 내리는 커뮤니티 차원의 결정이므로 독단적인 결정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역할 조직에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제하에 직원들을 바라본다. 첫째, 직원들은 각자의 꿈과 야망이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 열심히 일한다. 둘째, 직원들은 각자 자신의 이름을 걸고 최고의 품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일과 자아실현을 동일시하기 힘든 단순 제조업에서 보면 꿈만 같은 이야기이지만 프로 축구선수 손흥민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손흥민에게 주어진 전성기는 길어봐야 7년 정도고 그 기간 동안 손흥민은 최고의 커리어를 쌓아 몸값을 올려야 한다. 손흥민이 소속 팀에서 골을 넣는 것은 소속 팀에 충성해서, 또는 소속 팀의 관리자가 골을 많이 넣으라고 닦달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넣는 것이고 더 좋은 제의가 들어오면 팀을 언제든지 떠날 것이다. 제조업 관점에서 ‘이기적인 사람’으로 평가되던 이들이 혁신 시장에서는 스스로 동기부여가 된 ‘프로페셔널(Self-motivated Professionals)’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회사를 떠날 생각을 하는 직원들에게 혁신은 끊임없이 주어지는 과제다. 회사의 울타리를 벗어나 야생의 취업 시장에 나갔을 때 그들은 무엇을 가지고 자신의 전문성을 입증할 것인가? 그들이 얼마나 최신 기술을 잘 알고 있고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고 해나갈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입증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일은 내 목적에 부합하는 수단일 뿐이다. 경기에 나가는 손흥민이 경기가 주는 피로를 두려워하기보다 한 경기 한 경기가 자신에게 주는 성장의 기쁨과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에 즐거워하듯이 자신의 동기가 분명한 직원들에게 일터는 자신의 역량을 키우고 증명할 장이 된다.

우리나라는 더 이상 위계 조직에 기반한 제조업으로 성장해나가기 어려워지고 있다. 위계 조직에서 역할 조직으로의 변모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 기업들에 필요한 인재는 더 이상 말 잘 듣는 사람들이 아닌 스스로 동기부여가 된 프로페셔널, 최고의 전문가들이다. 이를 고려한다면 직원 입장에서 현재의 회사가 최종 목적지면 안 된다. 끊임없이 몸값을 높여 이직할 생각을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회사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길이다.

이런 역할 조직에서는 주어진 미션에 대해 정보를 모아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자신의 전문성을 더해 최고의 성과를 내는 사람이 최고의 인재다. 회사의 대표는 경영을 아는 한 사람의 전문가일 뿐이다. 영업, 마케팅, 연구개발 등 각 분야의 모든 직원이 경영자가 모르는 분야의 전문가들일 확률이 높다. 그래서 역할 조직에선 구성원 간 정보의 소통이 정말로 중요하다. 누구의 지시도 없이, 서로 의견을 구하고 정보를 주고받으며 일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면서 가장 이상했던 것은 누구도 나에게 업무를 지시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매니저는 구체적인 업무 지시를 주는 게 아니라 “한국어를 처리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라는 식으로 물었다. 두 번째로 놀란 것은 사람들이 친절하게 시간을 내서 내가 궁금해 하는 점을 자세히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들이 특별히 착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정보를 동료들과 공유하는 게 업무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연말 평가 때 그들이 나를 얼마나 잘 도와줬는지 평가했다. 이 모든 것이 소통을 중시하는 역할 조직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DBR mini box : 선진국형 기업들의 성장 전략
아무나 할 수 없는 일로, 세상에 없던 것에 도전


One to Thousands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은 성실하고 오래 일하는 사람이 제일 잘한다. 여기서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란 대개 투자대비수익률(ROI)이 높은 사업을 가져다 더 잘 해내는 것을 뜻한다. 여러 회사가 만들 수 있는 자동차, 여러 회사가 만들 수 있는 스마트폰을 남보다 더 빠르게, 더 낮은 비용으로, 더 잘 만들면 성공할 수 있다. 경쟁 우위를 점하고 그 격차를 벌려 초격차를 만들어내면 그 기업은 시장의 승자가 된다.

이런 경쟁 시장은 이미 존재하는 무언가를 대중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미 존재하지만 소수만 존재하는 제품을 가져와 참고해 유사한 수천 개의 제품을 높은 품질과 낮은 비용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하나를 수천 개로 확산하는, 즉 ‘원 투 사우전즈(One to Thousands)’ 전략이다. 이런 류의 일에는 개발도상에 있는 국가의 제조업 기업들이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다.

한때는 일본이 이 영역에서 최고였다. 소니의 워크맨으로 상징되는 일본의 제조업은 기존의 것을 가져와서 더 좋게 만들고 기술 혁신까지 이뤄 전 세계 어느 제품도 따라올 수 없는 지경까지 품질을 올리면서도 가격은 낮게 유지했다. 그런데 일본의 경제가 성장하고 임금이 올라가면서 소니의 경쟁력은 턱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미국 시장에서 한국의 TV가 2000달러일 때 소니 TV는 4000달러에 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품질의 차이도 크지 않았다.

2010년대에 들어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원 투 사우전즈 국가가 됐다. TV, 스마트폰, 반도체, 자동차 등 기술 기반 제조업을 주도했다. 그렇지만 일본이 우리에게 그랬듯 우리나라도 중국에 급속하게 그 주도권을 내어주고 있는 형국이다.


Zero to One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드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는 엄청난 전문성과 실패에 대한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에디슨의 전구,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포드의 자동차, 스티브 잡스의 스마트폰, 빌 게이츠의 윈도, 마크 저커버그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 구글의 검색 엔진 등은 많은 실수와 실패를 거치면서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냈다. 이처럼 세상에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드는, 이른바 ‘제로 투 원(Zero to One)’ 전략은 엄청난 리스크를 동반하며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를 처음 시장에 낼 때에 많은 전문가는 이미 마이크로소프트를 비롯한 많은 회사가 실패한 태블릿PC를 다시 내는 건 바보 같은 일이라고 했다. 당시 사람들은 PDA나 터치스크린이 달린 윈도 컴퓨터 정도의 물건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전용 OS를 갖춘 아이패드의 탄생은 완전히 새로운 시장을 창조했다.

이처럼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드는 일은 인류 발전 측면에서 큰 진보가 되기도 하지만 사업적 측면에서 보면 독점 시장을 열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다. 그래서 법으로 규제되는 독점 시장을 합법적으로 열 수 있는 것이 독보적인 제품을 만들어 특허를 획득하는 것이다.

이미 저렴한 노동력으로는 승부할 수 없었던 미국은 극한의 자유시장 경제라는 점 때문에 급속히 제조업에서 혁신 경제로 경제의 중심이 옮아갔다. 돈이 투자할 곳을 찾아서 매우 빠르게 흐르고 정부가 산업에 가이드라인을 최소한으로 주는 여건에서 미국의 돈은 중부의 자동차, 철강 산업을 뒤로하고 서부의 실리콘밸리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벤처캐피털들의 엔젤 투자가 생기기 시작한 이유도 리스크가 높지만 보상도 높은 혁신 시장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Zero to Thousands

최근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경제는 전 세계의 돈을 긁어모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마다 각종 광고를 통해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 등으로 돈이 유입되고 있다. 우버, 에어비앤비 같은 공유경제 서비스의 사용량은 전 세계적으로 늘어나고 있고, 넷플릭스,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도 글로벌한 스케일로 돈을 벌고 있다.

이러한 소프트웨어 중심의 글로벌 기업들은 스타트업에 성공만 하면 세계적인 스케일로 바로 성장할 수 있는 시스템을 실리콘밸리에 만들어 놓았다. 이른바 ‘제로 투 사우전즈(Zero to Thousands)’ 모델이다. 이제는 무에서 유를 창조했을 때 제로 투 원이 되는 게 아니라 소프트웨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유통망을 가질 수 있는 시대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 따라 혁신이 주는 경제적 효과는 제조업이 주는 효과를 넘어선 지 오래다.




실리콘밸리는 잘릴까 봐 열심히 일하는 곳이 아니다

정년이 보장돼 있고 기업 간 이동이 적은 환경에서는 기업에서 해고를 당하는 게 가장 두려운 일이다. 다른 기업들이 뽑아 주지 않으면 편안한 회사에 있다 칼바람 부는 야생으로 쫓겨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가혹하고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기업의 해고를 어렵게 규제하고 있다. 특별한 전문성이 없는 제조업 환경에서 젊을 때 실컷 이용하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내쫓는 행태는 너무 가혹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의 세상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가 된다. 유연하고 활발한 고용시장은 직원들이 오히려 몸값을 올릴 기회가 된다. 만약 이적 시장이 없다면 축구선수들과 야구선수들의 몸값은 그렇게 천정부지로 치솟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몸값의 변동이 크기 때문에 직원들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한다. 일을 안 하면 불이익을 받기 때문이 아니다. 일을 하면 몸값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몸을 편하게 하겠다고 최소한으로 일하는 것은 엄청난 기회비용을 초래한다. 몸값을 올릴 기회를 날리는 꼴이기 때문이다.

내가 회사에서 일을 하는 것도 잘릴까 봐 열심히 하는 게 아니다. 잘리는 건 오히려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몇 년 내에 떠날 회사이기 때문이다. 해고되는 이유도 실력이 부족해서라거나 조직에 적응을 못하는 등의 이유보다는 회사의 재정 악화로 프로젝트가 없어진다거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경우일 때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고 실력이 있다고 해서 해고를 반드시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세계 최고의 인공지능 전문가라 하더라도 회사에서 인공지능 개발이 필요가 없어지면 나는 회사와 헤어지게 된다.

역설적이지만 회사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 이유는 다른 회사들이 나를 찾게 하기 위해서다. 손흥민이 챔피언스리그에서 골을 넣는 것이 토트넘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다른 구단의 눈도장을 받아서 더 좋은 구단으로 가기 위해서인 것과 같다. 내가 채용 정보 업체 인디드에서 인턴 업무를 충실히 수행해 트위터의 눈에 띄었고, 트위터에서 열심히 일한 경력을 높이 사 에어비앤비가 내게 입사를 제안했던 것처럼, 내가 회사에서 열심히 일해 좋은 성과를 올리면 업계에서 나를 알아보고 더 높은 연봉을 제시하며 데려가려고 하게 된다. 반면 지금의 회사에서 별 성과를 못 올리고 좋은 경험을 쌓지 않으면 나를 데려가려는 회사는 점점 없어질 것이다.


전문성에 기반을 둔 채용은 활발한 이적 시장을 만든다

그렇다면 법과 규제로 고용이 유연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선 어떻게 해야 활발한 이적 시장을 만들 수 있을까? 아무것도 안 하고 몸 사리며 정년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까?

우리는 경쟁에서 밀려서 만년 과장이라는 이름표를 단 사람을 능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렇지만 그들은 치열한 공채 시험을 통과한 유능한 인재였다. 그들은 아마 세계 최고의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에서 5번째로 잘하는 스트라이커와 같은 운명이라 할 수 있다. 세계 5위의 실력자이지만 팀 안에서도 역시 5위여서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하는 선수들처럼 그들은 자신의 능력이 회사에서 상대적으로 밀렸다는 이유로 무시받으면서 괴로운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이제 나이도 많고 회사에서의 경쟁에서도 밀린 그들에게 주어진 최선의 선택은 온갖 수모를 견뎌내면서 회사에서 잘리지 않고 버티는 것이다.

그들에게 만약 연봉도 더 많이 받을 수 있고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레알 마드리드 팀 내에서 5위의 스트라이커를 데려갈 팀들은 줄을 섰을 것이고 아마 바로 다음 시즌에 그는 팀을 옮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밀려 있던 사람들도 자신의 진가를 이용할 수 있는 기업들이 나타나면 바로 뛰어들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는 그러한 옵션이 없었다. 돈은 대기업에만 있었고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은 능력이 엄청나게 출중해서 스카우트되지 않는 한 사회 초년생, 젊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공채가 전부였다.

물론 이러한 일은 연봉과 나이가 비례 관계를 이루는 상황에서는 있을 수 없다. 전성기를 지난 선수는 연봉이 내려가는 게 정상적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이는 정부의 규제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근본적 원인은 ‘평생 고용 마인드’에서부터 기인한다. 한 번 회사에 들어오면 평생을 책임져 준다는 약속이 프로페셔널들의 시장을 일을 잘 못해도 품어주는 가족 같은 공동체로 바꿔놓은 것이다. 만약 박지성 선수가 한때 잘했다는 이유로 평생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플레이어로 뛸 수 있도록 보장한다면 선수와 구단 양측 모두에게 꽤나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평생 선수를 보장받은 박지성은 40대에 들어서면 후보로 매일 벤치에만 앉아 있을 것이고 연봉도 매년 계속 올라간다면 구단 입장에서 큰 손해가 될 것이다. 또한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떠나 감독이나 해설자로 활약할 수 있는 기회도 빼앗게 돼 축구계 전체에도 손실이 될 것이다.

기업들이 기업에서 이것저것 할 수 있는 ‘제네럴리스트(generalist)’가 아닌 최고의 전문가를 필요로 할 때 채용의 형태는 크게 변화한다. 과거 위계 조직에서는 영업팀에 사람이 필요하면 엔지니어나 인사팀이나 기타 부서의 사람을 순환보직으로 발령 내면 됐다. 그래서 회사 전반을 잘 아는 제네럴리스트가 필요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영업도 최고 전문가가 해야 한다. 영업을 잘하는 사람과 엔지니어링을 잘하는 사람과 인사를 잘하는 사람의 자질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나라 회사들은 세계와 경쟁해야 한다. 이는 세계 수준의 전문화된 인력이 아니면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의미다. 그저 그런 축구팀은 골키퍼가 없을 경우 수비수한테 그 역할을 맡길 수도 있다. 세계적인 축구팀은 달라야 한다. 팀 안에 골키퍼가 없다면 외부에서 세계적인 수준의 골키퍼 전문가를 데려와야 한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인사, 마케팅, 엔지니어링, 디자인 모든 부문에서 전문가가 필요하다.

만약 인사팀에 사람이 비었을 때 과거 위계 조직에서 그랬던 것처럼 영업팀 사람을 데려오지 않고 인사 전문가를 새로 뽑게 되면 전문가 인력 시장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이때 핵심은 철저한 검증이다. 다른 회사에서 인사업무 책임을 잘 맡아 수행했다고 해서 우리 회사에서도 일을 잘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반대로, 다른 회사에서 못 했다고 우리 회사에서도 못 하리라는 법도 없다. 그래서 공채 형식에서는 여러 사람의 후보자를 놓고 틀에 박힌 질문을 하지만 전문가를 채용할 때는 한 사람의 후보자를 놓고 여러 면접관이, 또는 미래의 동료들이 심층 면접을 몇 시간에 걸쳐서 하게 된다.

이렇게 한 자리, 한 자리를 공채로 뽑은 사람을 돌리면서 쓰지 않고 전문가로 뽑기 시작하면 회사는 전문가로 채워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공채를 벗어나 직무 중심의 전문가 채용을 하게 되면 직원들은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지원의 대상이 된다. 전문가 직원들은 회사에서 안전한 선택을 하기보다 그들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성과를 올려 업계에서 각광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할 것이다. 그들이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앞에서 끌고 가고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커리어에 맞게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뒤에서 지원하는 것이 인사팀과 매니저들의 역할이 될 것이다.



마치며

며칠 전 매니저와 1대1 커리어 상담을 하는 시간이 있었다. 매니저는 “언젠가는 에어비앤비를 떠날 거죠?(You’re going to leave Airbnb sooner or later, right?)”라고 물으며 대화를 시작했다. 좀 당황스러웠지만 “뭐 언젠가는 그렇겠죠”라고 솔직하게 답했다. 그러자 매니저는 “회사를 떠날 때 어떤 능력을 갖추고 싶나요? 원하는 기술을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드릴게요”라고 말했다. 지금껏 백엔드(back-end) 엔지니어로만 일했던 나는 “프런트엔드(front-end)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매니저는 곧바로 프런트엔드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프런트엔드 방면 지식이 거의 없는 내가 참여하면 개발 속도가 훨씬 느려질 터인데도 내린 결정이었다.

왜 회사가 내 커리어를 위해서 이렇게 잘해줄까? 왜 회사가 내가 퇴사할 때 벌어질 일까지 걱정해 주는 걸까? 며칠간의 생각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나를 위한 마음도 있겠지만 결국 회사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 회사를 위해 하는 일이 내 커리어와 어떻게 연결되고 이직의 기회에서 어떻게 작용할지를 보여주면 나는 당연히 동기부여가 된다. 내 목표와 회사의 목표가 같아지는 것이다. 회사보다 내 미래를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직원, 그러한 이기적인 직원을 더 이기적이 되도록 커리어 상담까지 해주는 실리콘밸리의 회사 에어비앤비는 이러한 방식으로 직원의 개인적 목적과 회사의 목적이 일치하게 한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내 커리어의 성장과 몸값 상승을 향해 신나게 열심히 일한다. 지금 프로젝트의 멋진 성공을 통해 나는 많이 배우고, 성장하고, 업계에서 찾는 인재로 커나갈 것이다.

필자소개 유호현 에어비앤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email protected]
필자는 연세대 인문학부에서 영어영문학과 문헌정보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 대학원에서 문헌정보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주립대에서 정보학 박사 학위 과정을 밟던 중 트위터에 입사했다. 3년간 트위터에서 근무 후 에어비앤비로 이직, 2016년부터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이기적 직원들이 만드는 최고의 회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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