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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안동金씨’ 최고 권력 터 닦은 김조순. 왕실만을 섬긴 ‘겸손’, 명과 암을 낳다

김준태 | 194호 (2016년 2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조선후기 나라를 사실상 쥐고 흔들다시피 했던안동 김씨가문 권력의 출발은 김조순이었다. 정조에 의해 세자의 장인으로 선택된 그는 최대한 겸손하게 오직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는겸손자중을 통해 자신의 집안을 최고의 권력집단으로 만들 수 있었다. 2인자들은 김조순으로부터 ‘2인자의 처세와 관련해 큰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김조순의 경우 개인의 탁월함 덕분에 비록 당대에는 흔들림이 없었지만 그가헌신도덕성’의 바탕 위에 가문을 세워놓지 않았기에 후대에 안동 김씨 가문은 큰 비난을 받게 된다. 권력의 유지 외에 공동체의 미래를 고민하고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1862(철종 13) 어느 날, 어전회의가 열렸다. 삼정승과 육조판서 등 참석한 대신의 면면을 훑어보니 어딘가 닮은 얼굴들이 많이 보인다. 영의정 김좌근(金左根), 영돈녕부사 김문근(金汶根), 판중추부사 김흥근(金興根), 판돈녕부사 겸 어영대장 김병기(金炳冀), 이조판서 김병교(金炳喬), 병조판서 김병학(金炳學), 형조판서 김병주(金炳?), 지중추부사 김병국(金炳國), 대사헌 김병필(金炳弼), 대사성 김병시(金炳始).1 모두 안동 김씨 가문이고 부자, 사촌, 숙질 간이다. 권세가들이 자신의 일가에게 좋은 자리를 나눠 준 사례는 많았지만 이처럼 한 가문이 조정의 고위직을 독점한 것은 유례가 없던 일이다. 소위안동 김씨의 세도(勢道)2 정치로 그야말로 국정이 사유화된 것이다.

 

안동 김씨는 순조비, 헌종비, 철종비 등 3대에 걸쳐 연속으로 중전을 배출하고 60년 가까이 압도적인 세도를 휘둘렀다. 이들의 연대기는 곧 조선후기의 정치사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이는 누구로부터 시작된 것일까.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 답은 바로 이번 아티클의 주인공인 김조순(金祖淳,1765∼1832)에게서 찾을 수 있다. 정조에 의해 세자(훗날 순조)의 장인으로 선택된 그는 영안부원군에 봉해졌고 양관 대제학3 을 거쳐 훈련대장, 영돈녕부사 등을 역임한다. 신하로서 최고직급인 정1품에 올랐지만 그것은 국구(國舅)4 에게 주어진 명예였을 뿐 재상을 맡거나 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영의정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본 연재의 대상으로 적절치 않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안으로는 국가의 기밀업무를 관장하고 밖으로는 백관을 총괄해 살폈으며, 충성을 다해 국가의 안위를 책임졌다5 <실록>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명실상부한 실권자였다. 더욱이 탁월한 처세술과 정치력으로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2인자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럼 지금부터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때를 기다리는 겸손함에서 시작된 세도정치

 

김조순의 가문은 그야말로 당대를 대표하는 명문가다. 그의 7대조인 김상헌(金尙憲)은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의 거두로 절의의 상징이었으며, 김상헌의 형인 김상용(金尙容)도 이때 순국한 바 있다. 영의정을 지낸 5대조 김수항(金壽恒)은 송시열(宋時烈)과 친밀하게 교류하며 노론의 영수로서 정국을 주도했다. 역시 영의정을 지낸 고조부 김창집(金昌集)은 송시열의 제자로 소위노론4대신이다. 김수항과 김창집은 각기 남인과 소론과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사후 이들이 복권되고의리가 인정되면서 노론의 정신적인 지주로 자리매김했다. 신임사화(辛壬士禍)6 때 아버지 김창집과 함께 목숨을 잃은 증조부 김제겸(金濟謙)도 노론의 이념을 수호한 ‘3학사7 로 추앙받는다. 게다가 김창집의 동생인 김창협(金昌協)과 김창흡(金昌翕), 김제겸의 아들인 김원행(金元行) 18세기를 대표하는 도학자(道學者)로 손꼽힌다. 명예와 권위 면에서 어떤 집안도 따라올 수 없는 그야말로 조선의 교목세신(喬木世臣)8 이었던 것이다. (그림 1)

 

 

 

그림1 김조순 가계도(家系圖)

 

이러한 가문의 위광을 등에 업은 김조순은 1785(정조 9) 문과에 급제한 이래 주로 규장각에서 활동하며 시파(時派)의 중심인물이 됐다. 정조는 김조순을 매우 총애하는데 기본적으로 그의 능력이 훌륭했기 때문이겠지만그대가 능히 집안의 명성을 이어받아 어버이를 욕되게 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대 집안의 복일 뿐 아니라 조정의 복이 될 것이다9  “참으로 드문 명문가이다10 는 정조의 언급에서 볼 수 있듯이 배경에는 그의 집안이 작용한다. 정조는 영향력이 큰 가문을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포섭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 정조가 죽기 네 달 전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책봉한 것도 그래서였다.11 더 이상 자신의 건강을 자신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후계자에게 벽파(僻派)가 함부로 할 수 없는 강력한 가문의 후원을 붙여준 것이다. 순조의 회고에 따르면 정조는 김조순을 가리켜지금 내가 이 신하에게 너를 부탁하노니, 이 신하는 반드시 너를 잘못된 길로 보좌하지 않을 것12 이라는 유훈을 남겼다.

 

하지만 이런 김조순도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면서 위기를 맞는다. 자신의 딸이 비록 세자빈으로 내정돼 2차 간택까지 치르긴 했지만 아직 최종 절차인 3차 간택과 대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궁궐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대왕대비는 김조순과 대척점에 서 있던 벽파의 정순왕후(貞純王后)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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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준태[email protected]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초빙교수

    김준태 교수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유학대학 연구교수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왕의 공부』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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