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오랫동안 CEO들을 대상으로 심리클리닉 강좌와 상담을 진행해온 신경정신과 전문의 양창순 대인관계클리닉 원장이 리더들에게 필요한 마음경영 방법을 제시합니다. 많은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가는 경영자들이야말로 ‘마음의 힘’이 중요합니다. 마음을 강하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통해 인생을 변하게 하는 마술 같은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는 ‘기억’에 관한 팩트(fact)와 오해가 대단히 절묘하게 그려져 있다. 최근 개봉한 ‘북촌방향’도 그런 영화다. 주인공들은 자신의 생각(혹은 욕망)에 따라 기억을 재배치하고 아예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기도 한다. 영화를 보고 나서 새삼 진실과 팩트, 그 사이에서 빚어지는 오해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에도 잠깐 카메오로 등장하는 배우 고현정이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어떤 일을 겪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일을 제3자에게 전달할 때 때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나도 분명 그 자리에 있었는데 함께 있던 다른 사람은 어쩌면 저럴 수가 있을까 싶게 그 일을 정반대로 해석해서 이야기할 때가 있다. 난 분명 빨간색이라고 느꼈는데 상대방은 검은색이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그때마다 상처를 받는다.”
우린 흔히 진실과 팩트를 혼동한다. 대개는 그 둘이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여기서 팩트는 무엇인가? 아마도 빨간 것도 검은 것도 다 팩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경험한 사실을 사실로 주장할 권리와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 어떤 오해가 있는 것 또한 분명하다. 빨간색과 검은색은 누가 봐도 확연히 구분되는 색깔이다. 그런데 한쪽은 빨갛다고 하고 한쪽은 검다고 한다면 어느 쪽인가는 상황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더 나쁜 것은 누군가가 악의를 가지고 빨간 것을 검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가 그 자리에 있었고 자신의 말이 팩트라고 주장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물론 그건 분명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경우 진실과 팩트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아무리 진실이라고 주장해도 상대방이 믿지 않으면 공허한 울림이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결국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상처받는 쪽은 진실을 주장하는 당사자뿐이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현실이다. 그런 일은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인간관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때로 진실과 사실은 다르다
최희섭 씨도 최근에 비슷한 일을 당하고 큰 낭패를 경험했다. 그는 그 일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마치 옴짝달싹할 수 없는 덫에 걸린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동료와의 작은 말싸움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그 동료와는 평소 가깝게도 멀게도 지내지 않는 사이였다. 그와는 이상하게 서로 결이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강해서 희섭 씨 쪽에서 적당한 선을 긋고 지내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내 편에서 그런 느낌을 갖고 있으면 상대방 역시 용케도 그것을 알아차린다는 점이다. 동료 역시 그랬던지 희섭 씨에게만 유독 데면데면하게 굴긴 했다. 그러던 차에 업무상 부딪칠 일이 생겼고 그것이 작은 말싸움으로 번졌다.
그 일은 희섭 씨가 먼저 사과하고 상황을 마무리했다. 굳이 깊게 얽히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얼마 후에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다른 동료들이 그와 트러블을 빚었던 친구와 어울려 자신의 험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두 사람 사이의 사소한 말싸움이 꽤 큰 언쟁으로 둔갑한데다 진실 역시 일방적으로 희섭 씨 쪽이 불리하도록 각색돼 있었다. 터무니없고 기가 막혔지만 일단은 참았다. 처음부터 마음에 드는 동료도 아니었고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이 자신의 진실을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자신이 처신을 함부로 해오지는 않았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적어도 동료들이 일방적으로 그를 오해하진 않으리라고 믿었다.
물론 한편으로는 ‘정면으로 붙고 말아?’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기엔 사안이 경미했고 그런 일로 정면으로 붙고 어쩌고 하는 것도 우스운 일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희섭 씨에게 터무니없이 불리하게 돌아갔다. 상대방이 말도 안 되는 비방까지 덧붙여 악의적인 소문을 내고 다녔다. 나중에는 팀장까지 가세해서 그를 불러다 놓고 어찌된 일인지 따졌다. 결국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희섭 씨도 자초지종을 털어놓지 않으면 안 됐다.
그런데 그 후에 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팀장이 문제의 동료가 겨우 그런 일을 가지고 일을 이렇게 확대시켰을 리가 없다고 나온 것이다. 그러면서 오히려 희섭 씨가 진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먼저 사실을 밝히고 사과해서 빨리 이 문제를 마무리하라는 것이 팀장의 지시였다. 그건 오해고 사실은 이러저러하다고 주장해도 소용없었다. 한번 왜곡돼 퍼져나간 소문을 되돌리는 데 진실은 아무런 의미 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때서야 희섭 씨는 어머니들이 ‘버선목이어야 뒤집어 보이지…’ 하고 한탄하던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견디다 못한 그는 점점 분노와 피해의식이 커졌고 결국 상담을 받기에 이르렀다.
아마도 희섭 씨의 사례를 보면서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사례가 많다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진실과 팩트는 다르며 그 사이에서 얼마든지 오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로 인해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그만큼 흔하다는 뜻도 된다. 따라서 어쩌다 그런 일로 오해를 겪고 상처를 입더라도 지나치게 좌절할 필요는 없다.
“그래, 너한테는 빨간색이 검게 보인다면 그게 너의 팩트겠지. 하지만 나한테는 빨간색이 진실인 걸 어쩌랴. 너는 너의 길을, 나는 나의 길을 가는 수밖에” 하고 초연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힘든 일이다. 다만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덜 분노하는 노력은 기울여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만 할 수 있어도 상처와 좌절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다.
배려, 인간관계의 섬세한 테크닉
실제로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의 감각은 우리가 의식하든 하지 않든 죽는 날까지 작동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반대로 우리의 생각과 행동, 감정은 우리의 감각에 영향을 미친다. 최근에 뇌 과학자들이 그것을 입증했다. 사랑을 하면 눈이 멀고 화가 나면 실제로 보이는 것이 없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것은 곧 아무리 좋은 평판을 듣는 사람도 그를 만날 때 내 기분이 안 좋으면 그가 좋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뜻한다. 그런 경우에는 내가 그에 관해 받아들인 팩트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어디 가서 그에 관해 여과 없이 이야기를 한다면 그의 좋은 평판에는 금이 가고 나는 진실을 왜곡하는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남들이 나에 대해서 무례를 저지른다고 해서 꼭 화를 낼 일만은 아니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살다 보면 내가 상대방을 오해할 수도 있고 또 그 반대의 일도 생기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나는 A의 태도가 마음에 들어서 그를 칭찬한다. 그렇지만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은 내가 그에게 아부를 한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런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아부와 칭찬의 차이를 모르기 때문이다. 아부와 칭찬은 뿌리는 거의 같지만 결코 동류라고 할 수 없다(그건 때로 진실과 팩트가 동류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우선 같은 칭찬이라도 칭찬하는 사람은 빼고 듣는 사람만 기분이 좋은 건 아부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반면 칭찬은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다 기분이 좋게 마련이다. 또한 그 사람이 실제로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칭찬을 하면 그건 아부에 속한다. 칭찬은 실제로 그 사람이 어떤 일을 매우 잘했을 때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부에는 목적이 있지만 칭찬에는 목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진실과 팩트만큼이나 차이가 있는 것이 곧 아부와 칭찬이다. 그런데도 둘 사이를 오해하다 보면 역시 인간관계가 삐걱거리기 쉽다.
칭찬과 아부를 혼동하면서 조금 잘한 일을 두고 크게 칭찬해주는 것은 가식이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가식이라기보다 일종의 테크닉이라고 해야 맞다. 공부하는 데도 테크닉이 필요하고 일하거나 운동하는 데도 테크닉이 필요하다. 그런데 왜 인간관계에서는 테크닉을 쓰면 가식이고 위선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마음 가는 대로 솔직하게 하는 것이 인간관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진실하게 한다고 팩트만을 이야기한다고 하자. 과연 상대방이 날 오해할 소지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 마음이 얼마나 변덕스러운가? 1분 전에는 죽고 못 살 것 같던 관계도 1분 후에 너 죽고 나 죽자고 덤비는 살벌한 관계로 돌변할 수도 있는 것이 인간관계다. 그만큼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는 관계다. 그러므로 가장 섬세한 테크닉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테크닉이라고 해서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저 내가 설령 팩트를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진실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상대방의 상처를 염려해 말을 줄이고 감정을 여과한 후에 표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섬세한 테크닉이 아니겠는가. 그것의 다른 이름을 우린 ‘배려’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이 그리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점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꼭 진실이고 팩트라고 믿을 수 없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기에 그의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터질 때가 많다. <매혹>이란 소설을 쓴 크리스토퍼 프리스트란 작가는 “사람은 현재의 자기 이미지에 맞춰 기억을 재배열할 뿐 과거를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그러진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타인을 만날 때 상대방을 기쁘게 하거나 상대방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자신의 이미지를 어떤 식으로든 투영한다. 그의 이야기 역시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 프리스트의 이야기처럼 상대방을 기쁘게 하거나 상대방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자신의 이미지를 투영하고자 진실이 아닌 것을 팩트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악의가 깃들어 있지 않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주인공들 역시 마찬가지다.
문제는 악의를 가지고 진실이 아닌 것을 팩트라고 주장할 때다. 그런 경우에는 우리 모두 진실을 찾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양창순 원장은 정신과, 신경과 전문의로 현재 <양창순신경정신과·대인관계클리닉> 원장이다. 연세대 의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성균관대에서 주역과 정신의학, 리더십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정신의학회 국제회원, 미국의사경영자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ceo, 마음을 읽다> <미운 오리새끼, 날다> 등 자기계발, 대인관계, 리더십을 주제로 한 책들을 10여 권 넘게 저술했다.